창조론과 진화론 2
지구는 살아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지구를 구성하는 모든 것은 각각 살아 있습니다. 그것의 움직임이 충분히 인식 가능 한 것과 매우 인식하기 힘든 것의 차이가 존재하겠지만, 지구는 살아있습니다. 살아서 모든 것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지속하고 있음을 압니다. 그리고, 그 연결을 통해 전해지는 의사소통의 시간이 또한 많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좀 더 유의하여 관찰을 하게 되면, 지구를 형성하는 대륙이 인간의 형상과 매우 비슷한 부분으로 존재하며, 이루어 진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지구의 구성물을 통해, 우주에의 태양계의 모습을 가늠하게 하는 것으로서, 나무의 모습을 통해서도 살펴볼 수 있으며, 마찬가지로 여러 모습을 발견해 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는 유사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으로 사람을 만드셨다' 는 말씀이 확인과 입증이 가능한 세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를 기록으로 남기게 된, 놀라움과 해당 민족의 우수성의 이면의 존재 의미와 또한 그렇게 인도하신 창조주의 섭리가 있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바 빵, 떡은 번역과정에 있는 나름의 사연으로 인한 것으로 여겨짐, 을 가리키시며 이는 내 몸이며, 포도주를 가리키시며 이는 내 피라고 하신 말씀에는 상징의 형이상학적인 관념의 의미와 더불어 일반적인 사실의 상징적인 표현을 하신 것이라고도 살펴 볼 수 있습니다. 물론 당시에 그것의 실체를 아는 것은 불가능했을 수 있으며, 믿음으로만이 그 삶을 지탱해 가게 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과학의 발전의 덕택으로 좀 더 확실히 알아가게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진화론의 주장이 완전히 성경을 무시하고 있다고는 할 수 없기도 합니다. 창조의 질서의 언급, 물질과 생물로서 바다, 육지의 생물과 인간에 이르는 성경의 기록에 대하여 고뇌를 하였을 가능성도 있다고 보입니다. 성경의 창조의 그 각 절의 기록간에 연결을 시켜보려는 노력을 진화론 자는 시도했을 것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종간의 변이 가능성의 발견과 더불어 이를 통해 설명할 때 가능하게 될 수 있지 않는가라고 여겨졌을 수 있습니다. 진화론은 그 과정의 중간을 어떻게 연결이 가능한가에 초점을 맞출 수 밖에 없는 궁금증으로부터 기인한 이론으로 여길 수 있습니다. 그것이 과학, 관찰자의 존재이자 역할이기도 합니다.
태초의 인간인 아담은 배꼽의 역할은 형식적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왜냐면 그는 모태로부터 양분을 흡수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흙으로 직접 빗어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었다는 말씀은 오늘날 인간의 태생의 모습과는 좀 다르다는 것을 생각해 보게 합니다. 나무와 좀 더 관련성이 높습니다. 호흡에 필요한 생기로서 공기의 생성을 하게 하는, 암석과 바다와 나무 등으로부터 발생하는 공기, 산소 등이 그 호흡을 가능하게 하는 시초가 되게 하였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 순서에 입각한 지구의 구성물의 만들어진 순서에의 모습은 적합하다고 보입니다. 그리고, 그 오래 전 기록의 모습에 매우 놀랍기도 합니다. 그리고, 전기의 역할도 중요함을 압니다. 전기의 존재, 생성과 활동이 인간의 심장을 뛰게 하는 등의 중요한 역할의 부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기술한 창조론자의 입장은 역사가의 입장으로서 객관적이며, 주관적인 기록에의 의지에 좀 더 가깝다고 보입니다. 존재하는 사실에 대한 인간과 창조주와의 때에 맞는 현상을 기록하고 있음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진화론의 종간의 변이에 대한 창조론의 반박의 주류는 그것에의 가능과 불가능이라기 보다는 그러한 연구와 사실여부의 논의가 하나님이 원하시는가 아닌가의 두려움에 근거가 어느 정도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창조주의 영역을 알려고 하는 것에 대한 꺼림직한 정서와 더불어, 창조주의 능력으로서 당연히 모든 것이 가능할 수 있다는 믿음이라는 형이상학적인 관념의 전제에 주로 의지하며 그것을 추구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혹자는 주장하길 '진화론의 경우 원숭이가 변하여 사람이 만들어 졌다고 하는데, 그러면 인류의 모습 가운데, 지금의 주변에도 중간의 모습이 있어야 하지 않는가. 우리 주변에 그 중간 상태의 생물이 태어나든지, 활동하여야 하지 않는가'라는 어느 분의 의견과 마찬가지로 그렇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진화론에서는 그 모습이 인류의 조상으로 역사책 등에 기록되어 있는 중간의 모습, 오스트랄로 피테쿠스, 호모 사피엔스, 호모 엘렉투스 등의 유인원의 예를 들고 있죠. 그리고, 그들은 더 이상 생존에 부적합하기에, 더 나은 인간이 태어났기에 그들의 존재가 멸망을 할 수 밖에 없고, 사라졌다는 것이죠. 여기에의 반론으로 주변의 미개한 민족들, 저 오지의 섬 등에 거주하는 부족의 모습에서라도 존재 하여야 하지 않겠는가 의 견해를 보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모습은 여전히 골격은 좀 다를지라도 인간의 모습과 별반 차이가 없다는 주장을 합니다. 그렇다면, 이는 더 이상 필요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삶에는 그다지 필요 없는 것 같음에도 존재하는 것이 많이 있음을 압니다. 그것은 각자의 입장으로서 그렇다는 것일 수 있습니다. 각자의 틀 내에서 자신의 정당함을 주장하는 경우 그것이 전적으로 옳아 보이는 착각에 이르는 경우도 있음에 유의 해야 합니다. 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서로간에 공동체의 모습을 가지고 잘 살펴 보자는 것이죠.
성경 기록의 식물과 새, 물고기, 동물을 만드시고 사람을 만드시는 과정 가운데, 종간의 이동과의 연관성의 부분입니다. 여러 생물이 이미 번영하고 있는 세상에 인간이 독립적으로 탄생하여 그 성장 과정을 이룬다는 것은 해로운 세균, 바이러스를 포함 동물의 공격이 전혀 없어야 한다는 전제가 필요합니다. 또 한, 한 개가 아닌 무수히 많은 단세포가 발현되어 그 진행의 과정가운데, 어떤 것은 죽고 어떤 것은 살아나서 계속되는 동물간의 변형을 거처 오늘날과 같은 인간의 시초가 다수가 생겼다는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생각하기에 따라, 가능과 불가능의 접근이 가능할 수 있습니다.
믿음과 의문에 의한 관찰은 전혀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고 여겨집니다. 그것은 모두 피조물인 인간에게 부여된 심성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여하튼, 그 종간으로의 이동이 과연 가능 한가. 가능하겠는가. 왜 그러했겠는가. 왜 그 방법이 최선이었어야 하는가. 다른 방법은 없는가 등에 대한 종합적인 검증이 이루어 질 때에, 그것이 충분히 받아들여 질 수 있는 이론이 되며, 사실이라고 인식될 수 있음을 압니다. 사실 모든 사람의 하는 일은 이와 같은 과정의 지속일 수 있습니다.
논쟁의 주된 모습은 그 상대의 주장의 부족한 점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론적으로 부족한 점이 없는 이론은 없습니다. 왜냐면, 이론이라는 것은 부족한 점은 수반하는 것이기에 이론입니다. 부족한 점이 없다면 사실이 될 테니까요. 그러므로, 창조론, 진화론 모두다 부족한 점을 가지고 있는 이론이므로 서로를 수긍하게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는 사실이 될 그 때까지 존재가 가능한 영역이기도 됨을 알 수 있습니다. 서로에게 좋은 것일까요 나쁜 것일까요. 그리고, 어느 때인가. 사실 확인이 되어 한쪽의 경우가 증명이 공공연히 된다면, 더 이상 그 대립은 필요가 없을 것이며, 그러면, 그 다음 단계로 넘어 가야하고, 다른 사항의 삶에 진입하게 될 것입니다.
여하튼, 최초의 인간탄생의 그 모습이, 우주의 생성되는 별의 생성의 모습과 같이 그 미세한 입자들이 모여 거기에 적절한 또 다른 미세 물질의 개입으로 그 물성이 형성되어 생겨지게 되는 것과 같이, 인간이 지구의 형성과 과정 가운데, 그 최초의 사람의 형태가 존재하는 흙과 관련된 입자로부터 빚어지는 등의 과정의 사실여부는 불확실 하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여기에 부합하여 등장하는 가설로서 소개된 내용이 있는, 우주의 다른 것, 곳으로부터 어떠한 연유로 최초의 인간인 아담이 보내졌을 것이라는 가정에 대하여, 이 경우도 그를 보내신 이는 또 다른 앞선 우주에 존재하는 생명 사회 정도로서, 창조주는 아닐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창조주와의 만남이 아닌 것이 되고, 예수님의 오심의 설명도 오류로 이어질 수 있게 된다고 여겨집니다. 그러므로 그다지 신뢰할 수는 없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물론, 우주에의 어딘가에 지적 생명체의 존재가 전적으로 불가능하다고는 할 수 없다고 보입니다. 다만, 불확실 하고 알 수 없다는 것이죠.
천동설, 지동설의 학문적 이론의 제시는 그에 대한 이해와 설득이 되었기에 수긍하게 하였고, 실제로 확실히 관찰하게 된 오늘날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이 되었음을 압니다. 그러므로, 당사자간에는 서로 겸손의 자세가 요구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창조론에서 진화론을 용납하지 못하는 모습 또한, 종간의 변이를 확인할 수 없기 때문이고, 마찬가지로 진화론에서 창조론을 용납하지 못하는 모습도 생물이 창조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관찰되는 모든 것은 기존의 것을 토대로 생성되는 것을 관찰할 수 밖에 없는 피조물의 한계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과학자들은 오늘날 무엇을 시도 연구해 보겠는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우주에의 접근이 가능한 시대에, 우주의 공간에 행성을 만들어 보는 것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내부에 생물이 존재하게 해 보는 것일 것이다. 그것이 성경의 기록의 일주일에 가능할 수 있는 것인지를, 이러한 행동을 한다고 해서 그것이 창조주에 대한 불신, 불손 등의 감정으로 인한 것이 아님을 압니다. 그 또한 인간이 해 볼 수 있는 피조물의 능력에 부여되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것이 피조물인 인간에 의해 언제쯤이나 가능하게 될 것이며, 그리고, 실제로 가능이나 한 것인지는 알 수 없는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이 과정에 인간의 오만한 모습이 개입되고, 자신이 창조주가 되고 싶은 욕망의 개입이 생긴다면, 스스로 자신이 창조주와 같은 착각에 빠진다면 매우 주의해야 합니다. 필히 이를 경계하여야 합니다. 그로부터 잘못된 불행은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늘날의 과학 발전으로서는 그것에의 가능성이 더욱 높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근래에 예수님이 실제로 재림하셔도 믿지 못할 수 있습니다. 당시에는 나름의 모습으로 인해 그러했겠거니와 오늘날은 과학 발전으로 인해 누군가 그 모습을 과학 기술 등의 도움으로 인위적으로 해낸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는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예수님의 재림은 과거와 같이 인간의 실체적 오심이 아닌, 인간이 죽음에 이르러 영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때 이후 라고 여김으로서 가능하다고 여기는 세대에 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종간의 이동, 변형 문제가 주된 논쟁의 핵심이 되는 창조론과 진화론 지지자들 간에는, 물론 이러한 것에 별반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많이 존재 할 것으로 보입니다만, 많은 공통점을 토대로 이에의 주장을 하고 있음을 서로간에 알고 있음이 필요하다고 여겨집니다. 왜냐하면, 여러분들 중에, 아무도 진정한 의미로의 창조물을 만들어 낸 사람이 없기 때문이기 때문입니다. 이 모습 또한 서로가 가지고 있는 공통점이며, 그 모든 관찰 대상이 되는 물질과 생물들이 태초에 있어온 이후로부터 인간의 삶은 있어 왔으므로 모두가 그러한 공통점을 인지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창조론자와 진화론자, 창조적 진화론자, 진화론적 창조주의자 등은 같은 곳에 거주하고 있는 이웃이기도 한 사실입니다. 이는 지구를 벗어나거나 , 우주에 어디를 간다 하여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언제인가 좀 더 많은 사람이 보편적으로 그에 대한 사실을 알게 되는 때, 그 것이 창조론자의 주장이든, 진화론자의 주장이든, 마찬가지로 성경의 가르침과 근본적으로 달라지는 것은 없다고 여겨집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생물의 존재 모습은 언급되었어도, 그 발생 가능한 구체적 과정의 형태로서의 모습을 언급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진화론자의 주장이 사실로 드러나도, 그것은 창조의 토대 위에 설명 가능한 다른 모습이며, 창조론자의 주장이 사실로 드러나도, 그것은 창조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곡식을 빻아 가루로 만들어, 물을 섞어 반죽을 만들고, 불에 구워 빵, 떡을 만들 때, 최종 단계의 모습인 빵, 떡만 가지고, 빵, 떡을 창조했다고 하여도, 그 밖의 모든 먹을 것, 입을 것, 타는 것, 사용하는 것 , 모두 그 이면에는 여러 과정이 존재한 것으로서, 이를 놓고 이것이 진화로 설명한다 하여도 틀리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창조된 것이라 하여도 맞습니다. 모두가 자신의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창조든, 진화든 궁극적으로는 다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인간이 생각하는 사고의 절차의 차이만이 존재하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말씀 하셨듯, ‘아담과 이브의 선악과 사건 이후에 인간의 삶에 주어진 모습, 수고하고 일하며 사는 모습'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태초에 창조주 그분이 최초의 사람인 아담을 만드심의 사실은 예수님의 십자가위에 죽으심과 부활하심, 그리고 얼마의 기간 후, 그 모습 그대로 승천하심을 통해 인간은 창조의 질서가운데, 피조물로서 창조 될 수 있음을 연관 지어 믿을 수 있다고 여겨집니다. 언제인가가 될는지는 모르겠으나, 모든 이가 부정할 수 없는 그 때가 올 수 있을 것입니다. 아니, 저는 지금 발전된 과학 기술로 지구의 모습을 통해 그분의 생존해 계심을 목도할 수 있다고 할 수 있다고 보입니다. 지구 전체가 그 분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로부터 모든 것을 얻어 생활하고 있죠. 육체적이며, 영적인 필요를 지구 자체로부터 모두 공급 받고 생활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구를 잘 보존해야 합니다. 당신의 형상으로 사람을 만드신 외면의 모습은 지구의 대륙을 포함 전체적인 모습이 인간의 구성 부분과의 유사함을 통해 이해해 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주의 다른 행성에 생명체가 살 수 있다면, 이는 해당 행성의 모습이 그곳을 대표하는 생명체와 유사할 수 있다는 근거가 될 수 있다고 보입니다. 그러므로, 지구라는 공간 내의 삶으로서 예수님이 오심은 인간과 거의 똑 같은 모습이 타당합니다. 지구를 벗어나 외계의 공간의 경우는 그 구성 대륙의 모습이 인간과 다르다는 전제하에서는 그것은 창조주의 섭리 하에 있는 다른 요건이 형성되어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오늘날 태양계의 구성 행성 등의 경우 탐색이 가능한 시대에 살고 있음으로 인해, 그곳의 대륙의 모습을 살펴 볼 수 있고, 이는 인간의 구성 체계와는 유사점이 많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곳을 특정 대상의 신으로 여기는 모습에는 우를 범하는 것일 가능성이 많다고 보입니다. 물론, 대륙, 물 등의 존재가 특성화 되어 존재하고 있음을 살펴 볼 때에는, 마찬가지로 어느 정도 연관성이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입니다만 신뢰하기에는 무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한번 짚어볼 것이 있습니다. 최초의 인류 탄생의 비밀을 밝혀 보는 것이 일의 한 분야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것과 그것이 언제인가 밝혀 졌을 때, 그 다음에 무엇을 하게 되는가 입니다. 인간은 이미 충분히 삶을 유지하는 거의 모든 것을 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가족을 이루어 자손을 만들어 번영시키는 것은 이미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주 밖으로 도구를 개발하여 나가서, 그곳에 정착지를 건설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류의 탄생의 그 모습을 발견해 내어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우주의 그 공간에 항성을 탄생하게 하여, 그곳에 인간을 탄생하게 하는 방법에 관하여만 그것은 그 들인 노력만큼의 가치가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것이 더 필요하고 중요 하려면, 우주에의 그 정착 가능한 곳을 발견하고, 발견하였다 하여도 이동에 여러 장애가 있을 것으로 여겨질 때, 인근의 우주에 항성을 만들어 내어 사람을 만들어 살게 하는 방법, 항성만을 만들어 내어 그곳에 인류가 이동하는 방법 등에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이미 충분히 많은 항성, 행성을 발견하였음에도 실제로 태양계와 지구의 위치, 환경과 유사한 곳을 찾아 이동하기가 불가능이라고 판단될 때를 대비하여 그러한 경우에 그것은 어느 정도의 설득력과 그 다음으로의 삶에 진입하는 가능성으로서 가치가 있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또한, 인간이 하나님을 신뢰하는 삶을 산다면, 때가 되면 그 필요를 채워 주실 그 무언가를 제공해 주실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그 필요는 역시, 하나님의 섭리를 통해서 가능하다고 할 수 있으며, 우주의 존재 가능한 객체를 통해서도 가능할 수 있다고 여겨집니다.
앞서 설명한바 있는 지구 공전을 통한 시간 개념을 다시 한번 생각해 봅니다. 아주 작은 점 수준의 태양계가 있고, 이보다 크거나 훨씬 큰 우주의 일부분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공간의 내부에는 쉴 수 없는 많은 시간대가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조차도 더 큰 상태의 공간에서 일부를 차지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시간대를 지구에 살고 있는 인간의 관점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죠. 다른 표현을 쓰자면, 자기 중심적이 많이 있는 사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위 그림에서 보이지도 않는 지구를 포함한 태양계와 그리고 태양계와 유사한 형태의 우주내의 많은 ~계들의 움직임은 대체로 태양을 중심으로 한 공전의 개념을 수평적 도형에의 이해로 가늠해 보고 있는 것은 인간의 사고에 의한 것입니다. A 내지는 A-1의 회전 개념에 입각한 시간대의 존재로 인한 시간의 흐름 역사의 이해와 더불어, B, B-1의 회전 개념의 시간대가 없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를 통해서도 시간을 개념화하여 통제하려는 시도의 의미는 다분히 지구의 관점에 의한 것이 많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타의 곳에 생명체가 있는지, 지적 생명체가 있는지 여부에 대한 관찰도 계속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과 관련 지어서도, 어느 쪽의 확신을 가져서는 곤란하다고 여겨집니다. 모르는 것을 아는 것과 같이 얘기할 수는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것이 진리는 될 수 없음을 압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신, '아버지만 아신다'고 하신 부분이 있습니다. 하물며, 인간이 자신이 아는 것을 모두 정확하고 주장하는 것에는 무리가 있다고 여겨집니다.
각각을 회전하는 시간이 같을 수 없으며, 바깥의 원이 한 바퀴 도는 시간과 태양계가 도는 시간의 차이가 있을 겁니다. 상당한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태양계의 지름이 1mm 정도로 하고, 우주의 어느 바깥의 부분을 100 km 정도라고 할 때, 그 즈음의 우주의 바깥이 한 바퀴 도는데, 태양계는 얼마나 많이 회전하게 될까요. 내부나 외부가 같은 비율로 회전을 하게 되는 것일 가능성도 있습니다만, 이 경우 상상키 힘든 속도의 차이가 존재 하겠죠. 마찬가지로 훨씬 더 큰 차이가 있다고 할 때, 가늠하기가 힘들 것입니다. 천, 만, 십만, 백만, 천만, 억, 십억, 백억, 천억, 조, 경 km 등 일 경우는 어떠할까요. 그리고 그것이 한 개보다 훨씬 많다면 어떠할까요. 그리고, 시간의 횡적 개념 위에 종적 흐름의 개념 등의 존재 가능성을 더할 때, 그 규모는 알기 힘들 것입니다. 이는 한가지 예제 일뿐이며, 이보다 상상하기 힘든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또한, 아주 오래 전 과거에는 이보다 훨씬 작은 상태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시간이 절대적이라는 것은 오늘날 지구의 거주하는 인간의 관점에서 그러한 것이 됩니다. 그리고, 그 굉장히 오랜 시간의 기간에 상상하기 힘든 많은 일들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또한 과거의 경우에는 훨씬 짧은 시간대에 오늘날과 동일한 일들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오늘날의 태양계 내의 지구에서의 시간으로 나무 한 그루가 심겨져 완전히 자라나는데 20년이 걸린다고 합시다. 동일한 나무가 훨씬 과거의 태양계와 같은 구조 내의 지구와 같은 곳에 심겨졌다고 할 때, 당시에 우주는 훨씬 작으며, 태양계도 훨씬 작다고 할 수 있으며, 오늘날과 같은 시간 개념을 적용하였다고 할 때, 마찬가지로 같은 시간이 걸린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또한, 오늘날의 태양계의 관점으로 그 당시를 바라보면, 훨씬 짧은 불과 몇 시간, 몇 분 등에 그 일이 일어났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의 태양계의 지구의 나무가 자라는 20 여 년의 시간 개념이 지구, 태양계를 포함하고 있는 훨씬 바깥쪽의 우주의 어느 지점에서 살펴보면, 그 먼 우주의 지점에서의 시간으로는 불과 몇 시간, 몇 초, 몇 나노초에 불과한 것일 수 있습니다. 물론, 반대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이렇듯, 시간이라는 것도 위치, 거리, 공간 등의 여러 변수에 의해 상대적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 시간의 개념에 대하여는 다른 지면을 통해 언제 다루어 보고자 합니다
그 가늠하기 힘든 그 모습을 창조주라 여기고 살아온 경우에나 혹은 창조주의 개입하심으로 인해 알게 된 인간의 모습의 이후에 지속 되어진 인간의 역사를 통하여 오늘날까지 살펴 볼 때, 그 창조의 질서에 보다 더 합당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에 비해, 창조적 관점에 적합하게 되어 그 삶이 좋은 상태를 유지하게 되며 존속하게 된다는 것을 살펴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2015년 즈음 전의 과거에 오셨던 예수님을 통하여 주신 가르침이, 참 진리가 되는 것이기에 만민에게 전파되어 좋은 가르침의 말씀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창조주의 질서와 마음에 가장 합당한 모습을 하며 살았던 당시의 사람들 가운데 한 부부를 정하시고, 그 남자를 아직 알기 전의 여인을 택하셔, 스스로 잉태하게 하신 창조주 그 분으로서, 유일하신 분으로 세상에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었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평등한 가운데, 뛰어난 사람,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음은 사실입니다. 각자의 모습을 존중해 주며, 서로를 이해와 사랑으로 대하고, 당사자와 서로를 위해 각자 열심히 잘 연구하여 사실을 알려고 하는 모습을 지속하는 것이 좋은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좀 주의를 기울여 생각해 봐야 할 것으로는, 세상이 많이 변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과거에도 그 이전의 시점에 비하면 항상 많이 변했다고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이제는 살펴봐야 할 것들이 훨씬 많아져 가고 있다는 것을 압니다. 이전에는 때때로 있던 소규모, 지역적 다툼과 분쟁 등의 모습과 회복의 반복이 어느 정도 가능했었던 시기였다면, 이제부터는 무한경쟁의 모습에 점점 노출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주에의 지구의 그 위치적 모습은 감히 함부로 살기에는 회복하기 힘든 지경에 이를 수 있음을 살펴야 합니다. 태양계와 유사한 모습만도 엄청나게 많다는 관찰이 나오고 있는 세상입니다. 성경의 기록을 통해 그 정확성을 알 수 없는 부분에 대한 논쟁이었던 과거의 천동설과 지동설의 논쟁과 크게 다르다고 할 수 있는 근거가 없다고 보입니다.
어느 정도의 발생할 가능성이 있는 관리 가능한 정도의 적절한 분쟁 등을 넘어서게 되면, 아무리 자의에 의해 회복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때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는 시대에 진입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과학수준으로 우주의 어느 정도를 관찰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우주에는 지구의 생명체 이외에 어떤 유사한 생명체도 존재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반대일 수도 있습니다.
천동, 지동설의 때, 왜 어느 한쪽이 당시에 정확히 맞아야 한다는 주장을 했어야 하는 것을 살펴보면 이해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주장과 더불어 이어지는 또 다른 가능성의 주장, 당시에, 행성이 지구와 충돌 한다 던지, 재앙이 일어나게 된다 던지의 이어지는 가설에의 입증에 필요한 사전의 자신의 주장의 옳음이 있어야 한다는 경우는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을 수 있습니다. 또한, 잘못된 이론과 주장을 지속적으로 펼쳐 나아가게 되는 가운데, 여러 발생가능한 나쁜 파급의 효과에 대한 우려에 기인한 것일 경우에도 어느정도 이해를 받을 수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자신의 사적인 동기, 목표 등의 입지를 위한 사적인 목적을 위한 경우의 불순한 동기의 존재 가능성도 있을 수 있습니다.
삶은 때로는 모순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경우에 따라 인간의 불협화음이 생기기도 합니다. 그리고, 왜 그랬지 하며 후회하는 단계에 이르는 때가 있기도 합니다. 후회 정도면 그래도 괜찮을 것입니다. 그러나, 커다란 상처와 폐해를 남겼다면 어떠할 까요.
만약, 사실 자체를 밝히기를 원하는 것이었다면, 그냥 좀 더 관찰하고, 잘 살펴보는 정책으로서, 서로간에 잘 살펴 보자는 접근이 옳다고 보입니다. 그렇지 않고, 당시에 그의 옳고 그름을 공공연히 확약을 받으려 했던 처사에는 앞서 설명한 언급을 통해 볼 때, 좀 더 나은 미래를 위한 것에 대한 것이라기 보다는, 좋지 않은 욕심, 탐심에 의한 것이였을 가능성이 더 많이 관여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경우, 물론 좋은 방향으로 나아 가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보입니다. 오늘날도 가능성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혹시 있을 그 필요한 때를 위하여, 인간의 유익을 위한 근거 있는 주장의 존재는 필요하고, 좋은 결과를 얻게 되기를 바래 봅니다.
Aug 2015
다름의 이해의 노력과 존재 가능성의 접근은 삶을 풍성하게 할 수 있습니다.
창조론과 진화론, 둘 가운데 한가지는 맞게 되지 않을까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언젠가는 보다 정확히 알게 되겠죠. 좋아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해 보는 것 어떠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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