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론과 진화론 1
문제, 갈등에 직면하여, 아빠가 좋으니, 엄마가 좋으니 라는 질문에 아이는 혼돈스러워 합니다. 아빠가 하는 방식이 좋으니, 엄마가 하는 방식이 좋으니 라는 질문은 어떠한가요. 아빠가 옳으니, 엄마가 옳으니 라는 질문에, 아이는 둘 중에 어느 누가 옳은지는 제 3자 판단해야죠. 두 분다 옳을 수도, 두 분다 틀릴 수도, 둘 중에 한 분이 옳을 수도 있겠죠 라고 반응할 수도 있습니다. 사실과 더불어, 어쩌면 사실 보다는 왜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는지를 이해해 보려는 모습이 중요할 수 있습니다. 소통의 시작이 될 수 있습니다.
창조와 진화 그리고 그를 입증하고자 하는 여러 방향과 입장 등의 차이가 있습니다. 과거 때의 천동설과 지동설 때와 같이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보다 정확히 알게 될 수 있습니다. 오늘날은 양 진영이 각자, 당시와 마찬가지로, 나름대로의 지지 기반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서로간의 불확실함이 존재한다는 방증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완전히 설득을 시키고 있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해와 비를 악인과 선인에게 고루 내리신다'고 하셨습니다. 위의 분리된 입장을 악인과 선인으로 구분하는 것은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한편, 맞는 쪽이든 틀린 쪽이든 '그 해와 비를 고루 내리신다'는 것으로 생각해 봐도 무리가 없을 듯 합니다. 언젠가 때가 되면 좀 더 분명히 알 수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과거의 그 때와는 달리 좀 더 복잡하기에 그러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빛과 소금'의 말씀이 있습니다. 빛과 소금이 세상적인 그 모습의 삶에 더불어 있을 때, 그 빛과 소금의 역할을 드러낼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과는 구별되는 삶으로 만을 살려고, 저들과 어울려 지내지 않는다는 것은 어딘가 좀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아빠와 엄마가 서로 이해관계가 다르다고, 그 가족관계를 해체하는 것이 스스로 생각하기에 최선이라고 생각하는지 묻고 싶습니다. 물론 경우에 따라 그럴 수 밖에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한 경우에도, 비방보다는 경우에 따른 건강한 소통을 위한 모습은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입니다. 종교와 누가 분명히 옳고 그르고를 넘어, 현명하게 더불어 지내는 최선의 방법을 생각하는 것이 더불어 상생하게 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봅니다. 모든 시기가 그래야 할 것이라고 생각지는 않지만, 어릴 때부터 구분 지어지는 삶을 사는 것이 좋은 인간관계 형성에 도움이 된다고 하기에는 어딘가 모순이 있어 보입니다.
예로, 자신이 있는 곳에서 멀리 떨어진 어딘가를 간다고 합시다. 그 이용하는 교통편 등에 따라 시간소요가 다를 것입니다. 이는 변수인 여러 교통편이 제공 됩니다. 마찬가지로 동일한 교통편으로 거리를 다르게 정하여 움직인다고 합시다. 이는 변수인 거리로 인해 다르게 됩니다. 여기에 그 운전자의 성격 등의 변수로 인해 시간은 좀 더 다양한 조건 아래 각자에게 다르게 측정이 될 수 있습니다. 또한, 개인의 인지 기관과 그 전달체계의 구조의 차이로 인한 전달 시간의 차이 등의 변수로 그 각 해당 기관에서의 처리, 전달 속도가 차이가 있을 수 있듯, 포괄적인 공간에 존재하는 다양한 시간대의 이해와 그 각각의 개념의 처리, 소화의 차이 발생 가능성이 그 종합적이며, 공통적인, 공유하는 시간 개념에의 인식과 영향이 다르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인류의 그간의 오랜 시간의 논의를 거쳐, 때때로 논쟁의 단계로, 논의와 논쟁을 반복하며, 부드럽다가 때때로 첨예한 논쟁을 하고 있는 창조, 진화의 그 분쟁에의 노력이 사실 과도한 에너지 소모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기도 하며 창조, 진화에 대하여 나름의 가능성을 적어 봅니다.
화의 ㅗ 를 겹치고, 밑에 창의 ㅅ 이 들어가고, ㅏ 다음에 ㅇ 이 아래로 내려가면, '창'이 됩니다. 그 다음, 진의 ㅈ 밑에 조의 ㅗ 가 들여 놓고, ㅣ, ㄴ 를 떼어놓으면 조 가 됩니다. 마찬가지로, 창의 ㅊ 이 점 빼어 ㅈ 이되고, ㅏ 의 점 빼어 l 가 되며, ㅇ 을 좀 자르고 늘리면 ㄴ 됩니다. 조에 ㅈ 위에 점 붙이고, ㅅ 을 내려 둥글게 말아 ㅇ 를 만든 후, ㅗ 를 복사해 한 개는 내리고, 한 개는 옆으로 회전시키면 화가 됩니다. 보시다시피, 다 같은 것을 가지고 이래, 저래 붙이고, 옮겨 붙이면 됩니다. 다 비슷한 것입니다. 또한, 영어도 마찬가지입니다. Creation 과 revolution 둘 다 tion으로 끝나지 않습니까. 앞에도 이래 저래 조정하면, 다르기도 한 것 같음에도 그다지 다르지 않고 같은 것입니다. 물론, 다 같을 수는 없을 겁니다. 그럼에도 공통점을 발견해 보는 것은 좋은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거기에는 시간에 대한 관점의 차이가 존재한다고 보입니다. '천 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 년 같음', '나의 시간은 너희의 시간과 다름'의 성경의 언급은 과학적 해석이라기 보다는 관념적인 이해에 바탕을 둔 표현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거기에는 깊은 뜻과 과학적 해석의 가능성을 남기는 구절이 될 수 있기도 합니다. 하루를 24시간, 1,440 분으로 보는가, 86,400초로 보는가, . . 나노초로 보는가는 같은 것을 다르게 관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수 백년 전, 유럽을 떠나 아메리카 대륙을 가려면, 수년, 수개월이 걸렸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그 기간은 몇 시간대로 가능해졌습니다. 앞으로는 또한 어떨지 모릅니다. 좀 더 단축이 가능할 수 있을 겁니다. 이는 동일한 시간 개념에 기술의 발전이라는 행위가 변화되었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연장선상으로, 창조주의 능력으로 동일한 시간대에 훨씬 많은 상상하기 힘든 일을 하실 수 있음의 가능성은 당연히 높을 수 있습니다. 인간의 시간으로는 매우 오랜 기간을 소요하는 것이라도, 창조주는 순간에 가까운 시간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를 계산함에 있어서 같은 시간을 적용한다면, 창조주의 시간으로는 하루일 경우, 인간의 시간으로서는 굉장히 긴 시간이 될 수 있습니다. 이는 앞서 언급한 창조주 하나님의 하루가 천 년이라는 예시를 훨씬 넘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기록과 과학적 접근 자료의 차이는 충분히 성경을 통해서 발견의 가능성을 살필 수 있습니다.
성경의 기록을 단지 모든 문자의 기록 그 자체로 고정화 시키는 것은, 살아있는 성경의 말씀의 해석으로서는 거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융통성이 전혀 없는 글은 때로는 사문화 되는 것과 다르지 않을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창조의 기간의 각각을 하루라고 기록되었다고 하여, 오늘날의 하루와 동일시 하는 것에는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성경의 하루가 과학적으로 입증 가능한 정도의 수 억년과 같을 수 있고, 또한 하나님의 능력으로 오늘날의 시간의 하루라는 기간에 그 많은 일을 해내실 수 없다고 부정하는 것 또한 오류일 수 있음을 압니다.
현존하는 과학 기술로 우주의 항성, 행성의 생성을 관철하여 그 생성의 시간을 가늠해 보는 방법을 통해 지구의 생성의 기간을 추정해 보는 시도는 좀 더 사실에 근접할 수 있기도 합니다. 그를 통해 오늘날의 인간의 시간으로서 수십억 년이라는 추정을 해 볼 수도 있습니다. 한편, 수십억 년이라는 그 이전에, 아니면 수 만년, 수 천년 전의 우주의 크기 상태와 존재의 모습으로서는 지금과는 다른 시간으로서 하루에 그것이 가능할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할 근거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때와 거리와 질량과 구성요소 등의 차이가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구는 성장합니다. 인간이 성장기에 그 성장을 하듯. 오늘날의 모습을 역으로 거슬러 올라가 그 성장의 초기의 모습을 살피면, 그 '지구의 체적이 유사한 상태서 대륙의 이동으로 인해 오늘날의 대륙과 바다를 형성하였다'는 이론과는 별개로 그 애초에 오늘날 보다는 훨씬 작은, 예를 들어 자그만 국가 정도의 크기, 아니면 그보다 더 작을 수도 있는 크기로부터 시작했을 수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주의 크기도 마찬가지로 훨씬 작았을 수도 있습니다. 여하튼 그곳서 지구는 에너지의 흡수 생성 등의 작용을 지속하며, 점점 커지기 시작하여 오늘날의 크기로 진전된 것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지구의 지리적 모습과의 연관성을 살펴 과거의 인간의 탄생과 그 형성의 모습을 가늠하여 살펴 볼 수 있는 제공이 되기도 합니다.
이는 과학발전으로 인하여 검증이 좀 더 가능할 수 있습니다. 과학자들에 의해 입증된, 절대적인 것과 상대적일 수 있음의 예시를 통해서도, 인간이 관찰하는 것에는 매 순간 동일하게 반복하는 것과 같음에도 동일하게 반복하는 것과 더불어 가하거나 감해지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경우에 따라 그 더하고 빼지는 정도에도 다양한 모습을 띌 수 있습니다. 이는 우주에의 모습이 지구내의 모습을 통해 가늠해 볼 수 있게 하는 것으로도 설명이 가능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매년, 그 생물의 탄생시기, 성장의 기간의 차이 발생, 곡물의 수확량의 차이, 토질의 차이, 대기 질의 차이 등은 사실, 상대적인 관점에의 그것과 통하는 개념이 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지구 밖에 이러한 적용이 좀 다를 수는 있으나, 전혀 다르게 적용되는 것이라는 단정을 할 수가 없다는 것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가능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신이 거주하는 방에는 일정한 밀도로 채워진 물질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진공 상태의 어느 정도의 크기가 되는 공을 들여 놨다고 합시다. 그렇다고 그 밀도의 차이를 인간이 감지하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정밀한 계측기기를 사용하면, 감지가 가능할 수 있을 수 있으나, 대체로 무감각하게 느껴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굳이 진공의 것을 들여 놓지 않고서도, 어떤 큰 물체를 들여 놓으면, 해당 공간이 밀폐가 되어 있지 않으면, 구성 물질은 이동을 할 것입니다. 이 또한 그다지 차이를 느끼지 못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주에서도 유사할 수도 있고, 다를 수도 있다고 봅니다.
이것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동일한 시간 개념이라는 전제라도, 그 시간의 개념을 적용하는 때에 따라 다를 수 있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는 앞서 얘기한 동일한 시간의 다른 관찰적 차이와 더불어, 그 시간이 존재하는 시기에 따른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것으로서 살필 수 있습니다.
위의 그림은 우주 공간의 존재 가능한 시간대의 가능성의 추정으로서의 모습과 태양계 그리고 그 전체를 모아 그려 본 것의 예입니다. 물론 제가 정확히 알 수 없음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이해를 위한 개념적 접근의 시도는 충분히 해 볼 수 있다고 보입니다.
우주의 공간에 존재 가능한 다양한 시간대를 이룰 수 있는 공간의 존재는 밝혀 보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엄청난 공간에의 시간의 흐름이 다르게 존재 가능할 수 있음을 살펴 볼 수 있습니다. 시간은 동일하게 흐르는 것이라는 것은, 태양을 중심으로 하는 지구의 공전에 입각한 측정이기도 합니다. 태양계의 다른 위치에는 다른 시간대를 적용할 수 있고, 마찬가지로, 태양계 외의 여러 장소는 그곳에 맞는 시간의 흐름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주의 보다 넓은 장소의 개념으로서의 시간은 더욱 다르다고 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 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그 모든 존재가능한 시간의 형성을 종합하여 포괄적인 데이터를 통한 적절한 자료 산출의 근거에 의할 수 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창조주의 시간은 피조물인 태양계, 지구 등의 시간대와 다를 수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천 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다', '나의 시간은 너희의 것과 같지 않다'는 관념적 인식의 시간대가 주는 그 창조주에의 가늠할 수 없는 능력에 대한 경외감의 표현이, 실제로는 그러한 다른 시간대의 과학적 존재의 입증에 대하여 연결하여 사고해 볼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한다는 측면에서의 말씀의 기록은 의미가 큼을 발견하게 됩니다.
오늘날, 학교의 교과의 갈등으로, 공부하는 터전이 분립하는 모습을 자제하고, 어울려 해결하는 모습이 적절하지 않는가 생각해 봅니다. 창조와 진화의 주장에 있는, 그 불확실성을 서로 알고, 존중해 줌을 통하여 더불어 살 수 있지 않는가 생각해 봅니다. 단세포가 스스로 외부 환경에 노출하여, 그 생존을 계속하며, 그리고 같은 종이 아닌, 다른 종으로 변형 되어가며, 상상하기 힘든 그 오랜 시간을 견뎌내며, 인간으로 되었다는 것에 대하여, 불확실하다는 주장이 솔직하다고 여겨집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그 모태의 환경의 경우에는 그 미세한 단세포가 일정하게 성장할 수 있음을 모두다 압니다. 그러나, 체외의 조건에서 그것이 가능하여야 한다면, 그것을 믿기는 대다수가 곤란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에 대한 설명으로서의 진화론의 추측이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는 존중해 줄 수 있다고 여겨집니다. 그러한 방법 이외의 것을 충분히 신뢰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창조론을 믿습니다. 종들의 변형을 통해 인간이 되었다는 가설보다는 인간이 본래부터 인간이 되기 위한 그 필요 단계를 거처 인간이 되었다고 믿습니다. 그렇다고 진화론을 무조건 무시할 수는 없다고 여겨집니다. 아시다시피 확실한 경험을 해보질 않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진화론의 입장에서 창조론을 생각해 볼 때도 마찬가지로 믿을 수 없어 그렇게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언급한 바와 같이 확실한 것은 누가 봐도 확실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가설을 옳다고만, 그르다고만 주장하는 것은, 결국 서로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보입니다. 그러한 주장의 내세움만을 지향하는 것은, 과거의 경험에 기반을 둔 좋지 않은 역사적 반복의 모습에의 기억 때문일 가능성이 있다고 보입니다. 서로 상대방을 이겨야만 하는, 그러지 못한 경우의 여러 좋지 않은 경험에 기반한 두려움에 기반한 삶의 행태일 수 있습니다. 상생의 방향으로서 서로의 주장을 존중해 주며, 언제인가 한쪽이 올바른 것에 도달하게 되었을 때, 축하와 그를 수용하고, 일부 우위의 모습을 가질 수는 있겠으나, 결국 혜택을 공유하게 되는 모습의 경험이 부족하기에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자세를 가져 보는 것이 좋은 것이라고 여겨 집니다. 어쩌면 당연한 것으로서, 창조의 모습은 그 누구도 알 수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오직 창조주 그분의 영역이기 때문이기 때문입니다.
학업, 시험의 갈등의 경우, 학생들의 시험문제로서 내지를 않는 것은 어떠한지, 솔직히 불확실함을 인정하고, 좀 더 학문적인 모습으로서, 논쟁 중이며, 밝혀 가고 있는 과정에 있다는 것이 답에 가까운 것이 되는 것, 그에 맞게 각자의 주장이 있으나, 계속 밝혀 가고 있으므로, 불확실하다는 취지의 답을 만들어 제출하는 것은 어떠한지. 더불어 상생하는 삶이 좋은 방향으로 생각됩니다. 학교에서 분리되는 것이, 또 다른 학제를 만들어 내어 독립적으로 지내는 것이 가능할 수는 있겠으나, 기존의 학제를 통해 더불어 사는 모습을 배우는 것도 좋은 것으로 여겨집니다. 창조 신앙의 학제에 일반 학생들을 모집의 가능성은 이미 존재하는 것임에도 이를 잘 적용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두 사람이 같이 운동을 하는 것과 서로 운동 이상으로 이어지는 것의 차이는 에너지의 소모 수준의 차이와 경우에 따른 심대한 훼손의 경우가 생기는 것을 압니다. 이는 회복의 시기에 따른 회복력의 차이가 있음을 압니다. 소모적인 논쟁 보다는 논의 하여 서로의 선의의 경쟁 관계를 유지하여, 상생의 방향을 지향 하는 것은 어떠하겠는지 생각해 봅니다.
Jun 2015
다름의 이해의 노력과 존재 가능성의 접근은 삶을 풍성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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