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ere we going

 

삶에 있어서 경제 관념은 중요합니다. 잘 알든 그러지 않든, 가계 내지는 생활이라는 표현 이면에는 그 관점이 비중 있게 포함되어 있습니다.

좋은 균형은 무엇인가를 생각해 봅니다. 근래를 넘어, 제법 오래 전부터 전 세계 주요 국가에서 금리가 점차 낮아지면서, 언제부턴가는 낮은 금리가 계속 유지되고 있습니다. 물론, 이전에 비하면 이라는 전제가 있습니다. 금리, 이자가 무엇인가에 대하여는 설명을 생략하겠습니다.

과거에 비해 금리가 많이 낮아진 상태이기에, 금리가 많이 낮아지는 이유와 그래도 되는가에 대한 생각을 좀 해보게 됩니다.경제의 전문가들은 그에 대해 여러 연구를 하면서 많은 지식을 내어 놓을 것입니다. 물론, 낮았던 시절과 높았던 시절 모두 있었을 것입니다.
비전문가로서 무엇이 옳고 그름은 잘 판단하기 힘이 들 것이며, 다루어보려는 부분은 금리가 낮아진 이유와 낮은 상태를 지속하는 모습에 대하여, 한 의견을 제시해 보는 것입니다.

의문 제기와 함께하는 비판이 필요한 경우에도, 어느 정도의 긍휼의 관점을 함께함이 아마도 풍자의 유익이지 않겠는가 싶습니다. 또한 자신은 전적으로 무죄하다는 입장도 사실 근거가 희박할 수 있기에, 약간의 풍자적 관점을 통해 문제를 개선해 나가기를 바램에 이해 바랍니다.

여기 빵 한 개가 있습니다. 한 개의 무게가 한 1kg 정도이고, 가로 20 cm, 세로 5 cm, 높이 10 cm 정도의 크기 정도 입니다. 한 개의 빵을 만들어 놓고 이것을 누군가에게 팝니다. 가격은 대략 8천원 정도 하는데 괜찮게 팔립니다. 잘 만들어 맛도 좋습니다. 이 빵을 만드는데 비용이 5천원 정도 듭니다. 3천원 정도 이익을 봤으며, 대략 60%의 이익을 거둡니다. 그런데, 시절이 흐르면서, 주변 여건이 바뀐 것인지, 좋지 않아진 것인지, 경쟁이 많아져서 인지, 같은 빵을 만들어도 팔리기가 쉽지 않아졌습니다. 그래서 어느 때에 이르러서 가격을 낮춥니다. 그렇게 낮추다 보니 이익도 얼마 되지 않게 되었습니다. 때로는 손해를 보기도 합니다. 왜 그럴까요.

언젠가는 수고로이 노력하여 돈을 모아 은행이라는 곳에 넣어두면 예를 들어, 10 9 8 7 6 5 4 3 2 1 등으로 다양하면서도 대체로 높은 수치의 이자를 얻던 시절로부터, 근래는 점차 낮아지면서 은행에 넣어두면 도리어 수수료를 내야 하는 경우에도 이른 모습도 있습니다. 같은 선상으로, 대출을 받아 무언가를 해 보려 하여 돈을 빌리면 언제나 저축 이자율보다는 높게 책정이 되어 있기에, 은행도 이익을 얻어 유지하기 때문일 것입니다만, 그렇게 저축과 대출의 이자율에 차이가 있어, 항상 그렇지는 않겠지만 대출보다 저축을 많이 할 때 일반인들은 돈을 모을 수 있음을 압니다. 한편으로는, 돈을 은행에 넣어두어도 삶이 가능해지므로, 다른 부분에 성장이 이루어 지지 않음에 대한 반응 모습일 수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이런 저런 각자의 삶의 형편 모습을 이루며 살아가는 가운데 사람마다 경제에 대한 감흥이 같지는 않을 것입니다. 물론, 삶이 힘들고 한 배경을 들여다 보면, 여러 원인이 있을 수 있음에도, 경제에 관련한 지식 등의 부족이 원인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무슨 말을 하려고 왠 만한 사람은 다 아는 내용을 이렇게 적어 내는가 싶음도 계실 것 같기에, 요약하여 본다면 이렇습니다.

예를 들어, 이자가 8% 정도의 시절에는 같은 1, 2 정도의 숫자가 위 아래로 움직여도, 대략 많게는 몇 십% 적게는 몇%의 구간을 움직임에 반해, 이자가 1% 정도의 시절이면 1, 2 정도의 숫자가 위 아래로 움직이면 몇 십%서 몇 백%의 움직임의 구간이 된다는 것이죠.
어쩌면 이런 낮은 금리는 서민들을 위한 시장 조성을 위한 요소를 내포한 것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자본이 많은 사람에게는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을 것입니다. 실제로 낮은 금리를 잘 사용한다면, 좋은 효과를 얻을 수 있으며, 다만, 그런 기회를 알아보는가 여부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위험이 증가해 좀 더 조심해야 할 부분이 있음도 사실입니다. 한편, 과연 그 이면에 개인과 가정과 주변을 넘어 진정 지구 공동체에 좋은 장기적인 안목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과연 과소비가 삶의 불균형의 진정한 해결의 중심 역할로 적절한 방안인가, 어느 정도의 소비가 적정한가를 볼 필요가 있지 않는가 입니다.

성경의 기록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폭풍을 잠재우시기도 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여러 자연 재해 등을 언제나 신앙으로서 물리쳐 낼 수 있을지는 의문이며, 그 모습에 만의 기대도 이 세대에 무리가 있다고 보입니다. 환경의 부작용, 자연재해 작용 등의 과정을 증폭하게 하는데 과잉의 기여도는 적지 않을 것으로 보이며, 이는 그간 이루어 놓은 것을 되돌려 놓는 경우가 종종 있을 것 같습니다. 누군가는 자연 재해로 수입의 증가를 이루는 분야가 없지는 않겠지만, 종합적으로 볼 때도 그러한가에는 의문이 있습니다.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여전히 인구는 증가할 것이고, 산업의 규모는 더욱 증가해 나갈 것이며, 과거의 가난한 지역도 줄어들고 있다. 어느 정도 맞는 얘기일 것임에도, 부실과 자연 재해도 또한 증가할 것이며, 그런 모습을 선 순환인지, 선 순환이 아닌지, 어떻게 불러야 하는지는 논쟁의 여지가 있을 것 같습니다.

 

저기 바다에 배가 가고 있습니다. 한 배의 이름은 안정호로 좁은호 라고도 불리며, 다른 한배는 투자호로 투기호 라고도 불리는 것 같습니다.
자각 여부를 넘어, 삶을 살고 있는 대다수의 곳에서, 사람들은 이런 저런 투자 관련 행동을 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돈을 모아야 하는 이유와 함께 모으는 재미가 그 만큼 유별나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소유에 대한 인간 본성이 어느 정도이며, 어떠한가를 알 수 있습니다.

문득 좀 우스운 생각이 듭니다. 세상의 대다수의 사람들이 유야 무야 연루됨에 자유롭지 않은 금융, 돈, 자산에 관한 얘기입니다.
어느 날 예수 그리스도의 세우신 교회를 이루던 제자, 무리가 다른 곳으로 이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지역에 이르자 많은 사람들이 운집하여 있기에 가까이 봤더니, 그곳에 어떤 경기가 신나게 행해지고 있었습니다. 우연찮게 좀 구경을 하는 와중에, 다른 사람들과 같이 돈도 좀 거는 모습에 이르렀습니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누군가는 좀 해보다 잃고 길을 떠날 수 있고, 누군가는 잃은 돈을 되찾으려 밤새 그 일을 행하고 있을 수 있으며, 누군가는 그로부터 숨겨진 재능을 발견해 좀 더 머물러 있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딤 6:8,9,10) 라는 성경의 말씀이 있습니다만, 어쩌면 당시의 이후 요즘을 포함하여, 어느 시절의 기독교인 가운데 누군가 돈을 잃고 흥분한 체험에 근거해, 그 말씀을 내는 경우가 있을 수 있음을 잠시 유머로 생각해 보기도 함에 양해를 구합니다.

돈이 객관적, 실제적으로 함께하지 않는 곳 또한 찾기는 불가능에 가까우며, 성경 본문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 멀리 할 수는 없는 세상을 살고 있기에, 그렇다면 돈이라는 것을 좀 잘 알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실제 일반인은 물론, 기독교의 삶에 있어서 직업을 가지고 행하는 여러 일들 가운데, 그런 모습이 있을 것 같습니다. 계속 그 일을 열심히 하는데 때로는 탐닉하는 모습, 일 중독, 돈을 벌려는 여러 모습의 이면에는 그와 같은 혼란이 언제고 잠복해 있을 수 있습니다.

오늘날 이렇게 낮은 금리를 두고 지내는 모습의 이면에는 이런 배경에 대해 어느 정도 공감이 형성되어 있다는 것일 수 있습니다. 돈이 무수히 많은 자본이 풍부한 사람들에게는 더 좋은 환경이 조성된 것이면서, 동시에 돈이 없는 사람들에게도 적은 돈으로 잘 하면 과거에 비해, 높은 수익률을 얻어 기사회생으로 부의 토대를 이루어 낼 수 있다는 가능성이 공존하며, 서로간에 암묵적으로 이를 견뎌내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물론, 개인적인 생각을 표현하고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금액이 이런데 연관되어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런 모습과 무관한지는 알 수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어떻게 하면 건강한 삶을 사는가를 모르는 사람은 드물 것 같습니다. 근래, 의학의 발달에 의지하여 건강 관리를 소홀한 삶이 중병에 걸려도 연명하고 회복되는 경우가 증가하고 있습니다만, 많은 육체적, 정신적, 경제적 희생이 함께함을 압니다. 아마도, 경제적으로는 그런 연유로 세계에 많은 유동성 공급이라는 처방의 세대를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모두가 피해자이면서 나아가, 모두가 그로부터 혜택을 얻어가는 묘한 부분이 있습니다.

시대의 불안에 편승해 자신의 과오를 슬쩍 옮기려는 모습은 있을 수 있음에도, 그렇게 좋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과거의 어느 시점에는 그런 일이 가능할 수 있을 시대였다면, 오늘날에는 글쎄요 점차 불가능이지 않은가 싶기도 합니다. 너나 할 것 없이 서로 연루됨의 자변, 자족은 진정한 해결책은 아니지 않는가 싶습니다. 물론, 그런 모습이 여전히 가능할 수는 있어도, 혹여, 자신은 속일 수 없다고 하여도 그것도 가능한 세대이기에, 그럼에도 인생이 알 것은 속일 수 없는 분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또한 회개하는 자에게는 용서와 구원을 주심도 성경의 가르침으로 주십니다. 물론, 반복과 유지는 좀 다름을 압니다.

 

바다를 운행하던 그 배, 어디를 향해가는지, 알기는 하는지, 알 필요는 있는지, 무심한 그 배, 모두는 서로 다른 배는 아닌 것 같습니다. 운칠 기삼이라는 세상의 용어가 좀 있는데, 환란을 맞으면 그 결과는 좀 다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바다를 항해하던 그 배는, 시절을 겪으면서, 결국 작은 배는 넓고 깊은 바다를 운행하면서 위험이 증가하여, 커다란 배에 들려 옮겨져 동행하며 운행하게 되었을 것 같습니다. 저 멀리 바람이 불어 오고 있는데 변화라는 바람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근래 특정 전염병과 관련해 경험하는 동 세대의 구성원으로서, 함께 위로와 우려를 경험합니다. 한편으로는 이 세대에 우리는 과연 그간 과잉과 과열에 무감각하지 않는가에 대해 좀 더 심도 있게 다루어 보는 것은 어떠한가 생각해 보게 됩니다.

속도는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이며, 두려워 하는 것은 진정 무엇인가요. 과잉과 과열을 조절하며 낭비를 줄이고, 좀 더 균형을 이루며 호혜적 지속 가능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 인가요.

여러분은 어느 배에 타고 있다고 생각을 하시는지, 타고 싶은 배가 어느 쪽인가요, 혹시 만들고 싶은 배가 있으신가요

감사합니다.

Feb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