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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이는 주관이 대체로 뚜렷하여 선과 악의 한편에 주로 서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점차 나이가 들고 관점과 경험의 체험이 증가하므로 선과 악의 공존이 있음에 대해 부정하지 않는 삶에 들어섭니다.
그 공존에 대하여 누군가는 불온한 것으로, 누군가는 불완전함에도 존재 가능한 한시적, 위장된 평화, 안정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인으로는 선과 악의 구별되는 삶을 요함에도, 인생에 그것이 그렇게 쉬울 수 없음을 체험하며 포용하면서도 선에 서려 하는 인생을 사는 모습에 가깝습니다.

예수님이 오셔 복음을 전하던 그 시대를 지나 이천여 년이 흐르는 오늘날 복잡 다단한 삶의 모습 가운데, 평화와 좋은 삶을 위한 모습은 좀 더 난해한 모습입니다. 당시에도 세상이라는 모습 가운데 신앙을 유지하려는 모습이 여러 부분 유사했을 것임에도, 그런 체험에 놓여있는 삶은 그렇게 혼란 가운데 있을 수 있습니다.
무겁게 다루거나 가볍게 다룸에 차이가 있음을 압니다. 무거움에도 가볍게 다룰 수 있습니다.

부활절의 기간을 보내며, 성경의 여러 모습 등을 통해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 되는 모습들이 있음에도, 돌에 맞아 죽기 직전에 구함을 받은 여인의 얘기는 죄와 용서의 일련의 가장 드라마틱한 성경의 내용 가운데 한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여러 제자 가운데, 그들 모두는 나름의 사연에 기반하여 예수님을 영접함을 통해,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인 죄사함의 기쁨을 체험합니다. 그들의 체험 정도는 그간의 삶과 모습에 비례하여 다를 수 있습니다.

당시 천시받던 세리 직업가, 간음으로 죽음 위험의 여인 등 여러 모습 가운데, 그 절박함의 죄사함의 경험은 죽음에서 살림 받은 나사로를 포함하여, 오랜 병자 등의 다소 만성적 모습을 넘어, 급성의 모습에 해당하는 당시 간음죄로 돌로 죽음에 처하기 직전에 구함을 받은 여인이지 않겠는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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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예수님은 간음한 여인에게 돌로 치려는 군중을 향해, ‘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 (요 8:7-8)

어느 누구도 돌을 던지지 못했습니다.
서로 집은 돌의 크기와 모양이 다를 것입니다. 그 돌이 자신을 향할 수 있음에는 무관심합니다.
그렇다고, 모두 돌을 들지 않고 참아야 한다면, 결국 썩어 모두 망할 것입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 (요8:11)
죄의 용서로 전개된 것입니다.

비극이, 블랙 코메디로, 카타르시스적 희극으로 변화되는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인생들의 죄성, 약함을 콕 찝으시는 최고의 명의이심이 분명합니다.

용서받은 죄인은 누군가의 전유물이며 누군가에게 만이 가능한 특혜가 아닙니다.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며 은혜라고 여깁니다.

‘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요 4:14),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요7:37) ‘ 다시는 목마르지 않은 생명수를 주신다고 하십니다.

‘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눅15:7) ‘
하나님은 그 죄를 행함으로부터 돌이켜 회개하는 자를 기뻐하신다고 하십니다.

고난의 주간을 보내고 부활 주일을 넘어 인생들의 성령의 체험 주간을 향하는 이 기간, 고난은 곧 있을 부활의 기쁨으로 자리를 내어줍니다.

그 모두를 알고 믿는 기독교인으로서 때때로 인생이 고통과 고난의 구간임에도 부활과 승천이 있음을 믿음으로 인생은 희극이며, 블랙 코메디를 넘어서는 높은 차원의 최고의 희극입니다.
고난의 구간을 피하려는 고통의 모습이 있음에도, 기독교인의 정체성은 이를 극복하고, 최고의 기쁨에 들어서는 삶에 있음을 다시금 경험하게 됩니다.

오늘날 삶 가운데도, 누군가는 돌을 들려 합니다. 어떤 돌이 좋을까, 어떻게 던질까, 직구로 커브로, 최신 구법을 연구해 어떻게 던질까를 연구하는 모습이 있지 않는지 살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누군가는 재빠르게 이때다 돌파는 장사하며 흥행을 이룰 수도 있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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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시지 않겠습니까.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누군가는 그럴 수 있습니다. 그 때는 이미 이천 여 년 전이잖아요. 요즘은 다르죠.
저는 그렇지 않을 것 같습니다. 돌이 이제는 각종 신무기가 되어 인생에 관여하고 사용하려 하고 있음의 시대에, 여전히 예수님은 죄 없는 자가 정죄하라고 하실 것입니다.  

시대를 흘러 사람들은 창이라는 정죄에 맞서 방패를 들어 자신을 방어하는 모습에 이릅니다.
들키지 않음이 좋은 것이 될 수는 없습니다. 들켜 정죄에 놓임이 좋은 것이 될 수 없음에도, 그로부터 회개하는데 이른다면 그렇지 않음보다 좋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가 드러나고 용서받음으로 축복의 삶으로 들어서길 바라십니다.
예수님이 용서받은 죄인을 향해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용서받은 죄인이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앙의 길을 가는 삶이 또한 축복이며, 그 인생이 하나님 아버지에게로 향하게 하십니다. 

자신의 죄의 지적에 방어하고, 예비하기 위해 때로는 선제 공격하려는 모습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을 수 있겠으나, 다수의 경우에 사람의 본성이 이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어느 정도는 수긍이 가면서도 이에도 도를 넘으면 그것은 죄를 해결하지 못하게 합니다.

죄는 자신이 죄인임을 자각하고 참된 회개를 통해, 그 죄에서 자유함에 이르게 하심이 창조주의 지으신 바 생명체인 사람에의 참된 치유의 모습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감사합니다.

Mar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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