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와 진화론의 관점에서 보는 물질과 생물과 인간의 탄생
거기에는 시간에 대한 관점의 차이가 존재한다고 보입니다. '천년이 하루같고, 하루가 천년같다', '나의 시간은 너희의 것과 같지 않다' 의 성경의 언급은 과학적 해석이라기 보다는 관념적인 이해에 바탕을 둔 표현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거기에는 깊은 뜻과 과학적 해석의 가능성을 남기는 구절이 될 수 있기도 합니다.
하루를 24시간, 1,440 분으로 보는가, 86,400초로 보는가, . . 나노초로 보는가는 같은 것을 다르게 관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수 백년 전, 유럽을 떠나 아메리카 대륙을 가려면, 수년, 수개월이 걸렸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그 기간은 몇 시간대로 가능해졌습니다. 앞으로는 또한 어떨지 모릅니다. 좀 더 단축이 가능할 수 있을 겁니다. 이는 동일한 시간 개념에 기술의 발전이라는 행위가 변화되었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연장선상으로, 창조주의 능력으로 동일한 시간대에 훨씬 많은 상상하기 힘든 일을 하실 수 있음의 가능성은 당연히 높을 수 있습니다. 인간의 시간으로는 매우 오랜 기간을 소요하는 것이라도, 창조주는 순간에 가까운 시간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를 계산함에 있어서 같은 시간을 적용한다면, 창조주의 시간으로는 하루일 경우, 인간의 시간으로서는 굉장히 긴 시간이 될 수 있습니다. 이는 앞서 언급한 창조주 하나님의 하루가 천 년이라는 예시를 훨씬 넘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기록과 과학적 접근 자료의 차이는 충분히 성경을 통해서 발견의 가능성을 살필 수 있습니다. 성경의 기록을 단지 모든 문자의 기록 그 자체로 고정화 시키는 것은, 살아있는 성경의 말씀의 해석으로서는 거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융통성이 전혀 없는 글은 때로는 사문화 되는 것과 다르지 않을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창조의 기간의 각각을 하루라고 기록되었다고 하여, 오늘날의 하루와 동일시 하는 것에는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성경의 하루가 과학적으로 입증 가능한 정도의 수 억년과 같을 수 있고, 또한 하나님의 능력으로 오늘날의 시간의 하루라는 기간에 그 많은 일을 해내실 수 없다고 부정하는 것 또한 오류일 수 있음을 압니다.
현존하는 과학 기술로 우주의 항성, 행성의 생성을 관철하여 그 생성의 시간을 가늠해 보는 방법을 통해 지구의 생성의 기간을 추정해 보는 시도는 좀 더 사실에 근접할 수 있기도 합니다. 그를 통해 오늘날의 인간의 시간으로서 수십억 년이라는 추정을 해 볼 수도 있습니다.
한편, 수십억 년이라는 그 이전에, 아니면 수 만년전의 우주의 크기 상태와 존재의 모습으로서는 지금과는 다른 시간으로서 하루에 그것이 가능할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할 근거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거리와 질량과 구성요소 등의 차이가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구는 성장합니다. 인간이 성장기에 그 성장을 하듯. 오늘날의 모습을 역으로 거슬러 올라가 그 성장의 초기의 모습을 살피면, 그 '지구의 체적이 유사한 상태서 대륙의 이동으로 인해 오늘날의 대륙과 바다를 형성하였다'는 이론과는 별개로 그 애초에 오늘날 보다는 훨씬 작은, 예를 들어 자그만 국가 정도의 크기, 아니면 그보다 더 작을 수도 있는 크기로부터 시작했을 수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주의 크기도 마찬가지로 훨씬 작았을 수도 있습니다. 여하튼 그곳서 지구는 에너지의 흡수 생성 등의 작용을 지속하며, 점점 커지기 시작하여 오늘날의 크기로 진전된 것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지구의 지리적 모습과의 연관성을 살펴 과거의 인간의 탄생과 그 형성의 모습을 가늠하여 살펴 볼 수 있는 제공이 되기도 합니다. 이는 과학발전으로 인하여 검증이 좀 더 가능할 수 있습니다.
과학자들에 의해 입증된, 절대적인 것과 상대적일 수 있음의 예시를 통해서도, 인간이 관찰하는 것에는 매 순간 동일하게 반복하는 것과 같음에도 동일하게 반복하는 것과 더불어 가하거나 감해지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경우에 따라 그 더하고 빼지는 정도에도 다양한 모습을 띌 수 있습니다. 이는 우주에의 모습이 지구내의 모습을 통해 가늠해 볼 수 있게 하는 것으로도 설명이 가능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매년, 그 생물의 탄생시기, 성장의 기간의 차이 발생, 곡물의 수확량의 차이, 토질의 차이, 대기 질의 차이 등은 사실, 상대적인 관점에의 그것과 통하는 개념이 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지구 밖에 이러한 적용이 좀 다를 수는 있으나, 전혀 다르게 적용되는 것이라는 단정을 할 수가 없다는 것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가능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신이 거주하는 방에는 일정한 밀도로 채워진 물질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진공 상태의 어느 정도의 크기가 되는 공을 들여 놨다고 합시다. 그렇다고 그 밀도의 차이를 인간이 감지하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정밀한 계측기기를 사용하면, 감지가 가능할 수 있을 수 있으나, 대체로 무감각하게 느껴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굳이 진공의 것을 들여 놓지 않고서도, 어떤 큰 물체를 들여 놓으면, 해당 공간이 밀폐가 되어 있지 않으면, 구성 물질은 이동을 할 것입니다. 이 또한 그다지 차이를 느끼지 못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주에서도 유사할 수도 있고, 다를 수도 있다고 봅니다.
이것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동일한 시간개념이라는 전제라도, 그 시간의 개념을 적용하는 때에 따라 다를 수 있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는 앞서 얘기한 동일한 시간의 다른 관찰적 차이와 더불어, 그 시간이 존재하는 시기에 따른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것으로서 살필 수 있습니다.
위의 그림들을 통해서 볼 때, 시간의 흐름이 다르게 존재 가능할 수 있음을 살펴 볼 수 있습니다. 시간은 동일하게 흐르는 것이라는 것은, 태양을 중심으로 하는 지구의 공전에 입각한 측정이기도 합니다. 태양계의 다른 위치에는 다른 시간대를 적용할 수 있고, 마찬가지로, 태양계 외의 여러 장소는 그곳에 맞는 시간의 흐름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주의 보다 넓은 장소의 개념으로서의 시간은 더욱 다르다고 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 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그 모든 존재가능한 시간의 형성을 종합하여 포괄적인 데이터를 통한 적절한 자료 산출의 근거에 의할 수 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창조주의 시간은 피조물인 태양계, 지구 등의 시간대와 다를 수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다', '나의 시간은 너희의 것과 같지 않다' 는 관념적 인식의 시간대가 주는 그 창조주에의 가늠할 수 없는 능력에 대한 경외감의 표현이, 실제로는 그러한 다른 시간대의 과학적 존재의 입증에 대하여 연결하여 사고해 볼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한다는 측면에서의 말씀의 기록은 의미가 큼을 발견하게 됩니다.
더불어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으로는, 학교의 교과의 갈등으로, 공부하는 터전이 분립하는 모습은 자제하고, 어울려 해결하는 모습이 적절하지 않는가 생각해 봅니다. 학업, 시험의 갈등의 경우, 문제와 해답을 제외하든지, 좀 더 학문적인 모습으로서, 논쟁 중이며, 밝혀 가고 있는 과정에 있다는 것이 답에 가까운 것이 되는 것이 좀 더 솔직한 모습이 아니겠는지 생각해 봅니다.
두 사람이 같이 운동을 하는 것과 서로 운동 이상으로 이어지는 것의 차이는 에너지의 소모 수준의 차이와 경우에 따른 심대한 훼손의 경우가 생기는 것을 압니다. 이는 회복의 시기에 따른 회복력의 차이가 있음을 압니다. 소모적인 논쟁 보다는 논의 하여 서로의 선의의 경쟁 관계를 유지하여, 상생의 방향을 지향 하는 것은 어떠하겠는지 생각해 봅니다.
Jun 2015
다름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인간미의 요소이기도 합니다. 다름의 존재 가능성의 접근은 삶을 풍성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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