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esthetic of repeat
반복에는 유익과 무익이 공존합니다. 좋은 무언가를 반복하는 모습과 좋지 않음을 반복하는 모습은, 같은 반복인데 다른 길을 지속하는 것 같습니다. 물론, 때로는 서로 만날 가능성이 전혀 없지는 않을 수 있습니다. 삶은 계속된 선택의 과정이며, 서로 간에 다른 모습으로 교차지점에 이를 수 있습니다. 삶에는 실수가 없을 것이며, 자신은 주로 옳은 일을 행한다는 자긍심에 때로는 주의해야 함을 압니다. 교만이 될 가능성이 잠재해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근래 경험하는 전염병에 위로와 우려를 경험하며, 삶에의 어떤 우려의 문제는, 이전의 여러 존재하던 문제의 또 다른 표출로 볼 수 있으며, 그렇게 새롭지는 않을 수 있습니다. 과거의 어떤 잘잘못에 대한 경각심을 되새기고, 증감하게 하고 있다는 긍정과 부정이 함께하는 것 같습니다. 진정한 성장의 전제는 건전과 건강의 위에 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문제의 이면을 보고 다루려는 접근이 좀 더 유효함을 모르지 않을 것입니다. 직접적인 외면과의 마찰을 제외하고, 어떤 외적인 증세, 얼굴에 드러나는 외적인 증세 등은 그 외면을 넘어, 인체 내부 어딘가의 문제에 대한 경고의 발현인 것임에 주의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만, 여러 경우 무심히 지나는 경우가 많은 것도 사실입니다. 적절하지 않은 대응은 얼굴의 피부 향상을 위한 단기 처방에 그칠 가능성이 있으며, 시간이 흐르며 부조화로 이어질 가능성이 많습니다. 계속 다른 곳에 자원을 투입하여 돈은 돈대로 쓰며, 잠시의 증세 호전을 착각할 수 있으며, 진정한 증세는 호전되지 않으며 삶은 지속적으로 불완전해 지는 모습에 이릅니다. 어떤 치료를 위한 돈의 지속적 소모와 그럼에도 고쳐지지 않고, 고생하는 모습의 반복에 대해서 성경의 여러 곳을 통해 그 모습을 알려 주십니다.
성경의 여러 기록을 통해 알게 하시는 것은, 많은 경우에 있어서 인생은 외면에 주로 관심을 두며, 단지 현상에 관심 있는 어떤 의사도 그런데 일조하고 있는 모습에 대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본질을 다루시며, 궁극적인 해결을 이루어 내심을 성경을 통해 전하고 계십니다. 누군가에는 이해하기 힘든 형이상학적일 수 있습니다. 물론, 누군가에게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성경에 대해 이해하고 아는 분은 그렇지 않겠지만, 잘 모르는 사람의 경우에는 생소할 것이기 때문임에도, 창조주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그렇게 어렵지 않게 말씀하심을 알 수 있습니다.
세상에는 여러 훌륭한 사례와 경험을 바탕으로 한 지식이 존재하여 나눌 수 있을 테지만, 언제나 성경의 가르침은 항상 최고임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최고라는 의미를 종종 이기적, 개인적으로 해석하곤 함에 주의해야 한다고 보입니다.
언제나 명의와 그렇지 않은 의사는 존재해 왔으며, 그들의 주된 차이점은 현상을 다루는가, 이면을 다루는가, 현상과 이면을 복합적으로 다루는가의 차이에 있음을 사람들은 압니다.
과잉과 과열은 때로 존재합니다. 그럼에도, 도를 넘어섰다는 것으로, 언제고 이는 정상 수준을 발견하고 회귀해야 함을 전제합니다. 그리고, 그 모습의 정도에 따른 회귀와 그에 따른 부작용도 적지 않게 된다는데 있습니다. 물론, 누군가는 이 세대는 과학 기술 등 첨단 분야에 있어 이전보다 발전했기에 효과적으로 다루어 낼 수 있다는 취지에, 과연 그러한가의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과한 자신감은 조심해야 하지 않는가 싶기 때문입니다.
지적과 비판은 손쉽게 누구나 할 수 있음을 압니다. 그런 시기는 필요하여도, 궁극적으로는 해결 방안을 통해 좋은 삶을 이루어 내는데 이르는 것일 겁니다.
경제를 진단하는데 주로 성장률을 얘기합니다. 오늘의 모습이 이전에 비해 얼마나 증가하였는가, 잘 가늠하기 힘든 내면과 정신적인 부분 보다는, 눈에 보이는 외형에 대해 가늠하는 모습입니다만, 이를 사용하는데 나름의 경험적 합리성이 있기에 사용하고 있다고 보입니다. 그런데, 좀 살펴봐야 하는 부분은, 같은 1, 2, 3, 4, 5 … 이어도 시대에 따라 과연 같은가 입니다. 과거의 어느 규모가 적었던 시기에는 성장률이 5% 이상이었다면, 근래의 1% 정도의 낮은 성장률은 과연 그렇게 낮은가 입니다. 도리어 과거의 어느 시점보다 한 해의 생산량이 더 내지는 훨씬 많다는 것일 수 있습니다. 예로, 20년 전에 1억에 5%면 5백만원인데, 오늘날 규모가 커져 100억에 1%면 1억이 되고 그 차이는 적지 않습니다. 성장율이 낮지만 규모가 훨씬 크죠. 물론, 달라진 변수는 여러 분야에 걸쳐 있을 것입니다만 제 취지는 과잉과 불균형을 다루는 것임을 이해바랍니다.
이런 세대에, 모든 분야와 모습에 항시 그렇지는 않겠지만, 단지 계속 과거와 비슷한 성장률을 지속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불안을 조성하고, 그로부터 과잉과 과열은 누적되고 오늘에 이르고, 우리는 그 부정적 체험의 당사자에 놓이게 된다는 것에는 유의해야 않는가 싶습니다. 이는 다른 분야도 비슷할 것입니다. 단지 성장주의에의 미혹에 주의해야 하지 않는가 싶습니다. 진정한 성장은 일부의 성장만이 아닐 것이며, 견실한 기초 위에 가능함을 모르지 않습니다.
오늘을 참고 인내하면 결실은 내일 거둔다는 말이 있는데, 대체로 적절한 환경을 유지하면서 참을 때 적절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성장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 인가요. 바래기는 모두를 위한 것 아닌가 싶은데, 실상은 어떤지 의문입니다.
이와 관련해 많은 문제가 수 많은 분야에 걸쳐 존재하고 복잡 다단한 모습가운데, 간략하게 다루어 보려는 부분이 있습니다. 미세먼지입니다. 대체로 오염물질의 결과물로 여겨지는 미세분진, 미세먼지와 관련된 부분입니다.
미세 먼지라고 불리는 부분의 해결은 과연 어디에 정답이 있는가, 온전한 정답은 불가능해도 가능한 최적의 답은 어디에 있지 않는가 싶습니다.
어떤 결과물을 분해해 내는 것에는 여러 모습의 개입이 있을 것이며, 인위적인 개입과 자연발생적 개입으로 나뉘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과학 등의 접근을 토대로 어떤 적용을 하는 모습과 창조와 피조 세상의 역학 질서에 의해 이루어 지게 하시는 자연 분해 체계의 등장이 있을 것입니다. 그 원인 파악과 이의 조절을 소홀히 해서는 곤란할 것 같으며, 책임을 자연 분해에 미루며 그에 기대어, 인류가 할 수 있는 모습을 뒤로한 채, 자연 체계에 주로 의지해야 한다는 전제도 그렇게 유효한 것인가라는 의문이 듭니다.
그런 와중에 다루어 볼 얘기는 아는 얘기의 반복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는 아는 것이 없기 때문에, 모르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아는 것을 실행하지 못하거나, 않거나, 잊어서, 그 현상의 시기에 여러 다른 대응 조치를 취하는 모습에 이릅니다. 이런 반복이 일로, 순환이 되며, 인생에 있어서 지속적으로 삶을 이루어 가는 모습으로, 고난이 고통이 되어 희로애락의 한 부분을 이룹니다. 물론, 좋은 모습의 반복은 즐겁고 좋은 모습이 됩니다. 선택은 언제나 우리 자신에 있으며, 누군가를 탓하고 싶고, 그럴 수 있음에도, 진정한 해결은 함께 해야 한다는 인식과 의지에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얘기가 좀 길었습니다.
굴뚝입니다. 이전에 언급해 본 적이 있고, 이런 생각을 해본 사람도 적지 않을 줄로 압니다. 단지 굴뚝을 넘어 배출 시스템이라는 체계의 효과적 적용에 있습니다.
잘 모를 경우에는 피조물인 인체를 잘 살펴보면 될 것 같습니다. 생명 유지의 체계에 있어 공급과 소화에 이은 배출 작용 구조는 다른 부분도 그렇지만, 그렇게 단조롭지 않습니다. 굉장히 잘 이루어진 체계와 전체에 대비하여 그것도 짧지 않고, 길게 제법 오랜 구간 통과해야 하는 구조로 이루어져 있음을 압니다. 무엇보다도 소화, 배설기관을 잘 이루어 내는 것이 우선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결국, 경제, 산업 분야에도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할 것 같습니다.
잘잘못은 대다수에게 있을 것입니다만, 좀 더 앞서있는 선진국의 잘잘못이 있음에 대해, 비평의 소지는 그들 스스로도 그러한 경험에 대해 복기를 제대로 하지 않은 것 같다는데 있습니다. 그로부터 좀 더 개선하고 안전과 높은 효율에 가까운 배출 시스템을 개발 이루어 놓고, 그것을 자국을 넘어 개발국, 중진국, 후진국의 공장 등 설립에 전수하고 나누어 주는데 부족함이 있었지 않는가 싶습니다. 혹여 있었을 제안을 받아들이는 입장의 곳도 근시안으로, 유지 관리 비용의 부담으로 좋은 설치를 거부한 모습은 없는지 궁금합니다.
경제가 그렇게 지속되어도 당사자들은 그런 피해의 거리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고 느끼며, 스스로도 그런 폐해에 대한 보완에 관심을 잘 이루어 내지 못하여, 결과적으로 좋은 배출 시스템의 부재와 적용 미비는 그간 이렇게 대기를 오염하게 하며, 과거에 비해 나아진 곳과 함께 그렇지 않은 곳도 존재하기에, 그 모습이 다른 곳에 반복되고, 결과적으로 스스로를 포함하여, 지구 공동체의 운행에 부작용의 한계치를 넘어가면서 그 파장은 근래의 전염병 등의 증세를 통한 경고의 현상으로 드러나게 된 것으로 본다면 과연 잘못된 진단인가 싶습니다. 물론, 알맞게 먹고 충분히 소화하는 시간이 필요하듯, 소유와 생산과 소비 등의 좀더 복잡다단한 모습이 연루되어 있을 것입니다만, 우선 굴뚝과 같은 최종 처리 분야에의 연관성에 집중해 보려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도 그와 다르지 않은 모습입니다. 무리하면서 어느 정도 보낼 수 있어도, 그에 비례하며 후유증이 드러나게 됨은 그렇게 어렵지 않게 예측 가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전능하신 창조주에 의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그 병 고침의 사역의 효험을 본 제자, 당사자들에게도, 그 유지의 의무는 여전히 당사자에게 있음을 간과해서는 곤란하다고 생각합니다. 병 고침 받았다고 그 이후에, 그 원인이 되는 과거의 모습을 지속한다면, 증세 반복의 도래는 이상하지 않을 것입니다.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이에 이르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가서 보니 그 집이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 심하게 되느니라 (눅11:24, 25, 26) 의 말씀이 있습니다.
유지, 관리의 소중함을 전하고 계시다고 봐도 무리가 없는 가르침으로 보이며, 인생을 넘어 경제 산업 체계에 있어서도 이와 같은 반복적인 부분을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책임을 논하며 논쟁을 하려는 것이 아니며, 해결에 집중하려는 것임에 이해를 바랍니다.
인생의 이런 세대와 시기를 들어, 부자가 더 부자가 되기도, 가난하게 되기도, 가난한 사람이 형편이 나아지기도, 때로는 부자가 되기도 하는 절묘한 타이밍의 세대라고 언급함이 가능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만큼 경제의 등락을 반복하니 그런 기대가 가능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약간의 풍자입니다만, 그런 희망이 없다면 약자의 인생이 좀 고달플 것 같기도 합니다만, 그들도 좀 더 지식의 이해와 함께 해야 함을 간과하기에 그 바램을 이루기 힘든 모습도 있는 것 같습니다.
동 세대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의 소유에 대한 지향은 그렇게 시대의 불안과 함께하며, 인생의 삶의 기대가 그 만큼 오묘한 부분이 있음을 발견합니다.
기독교인 여부를 넘어 경제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좀 더 복합적인 관심을 지닐 것 같습니다. 그간 자신의 분야에서 잘 다진 사람들은 어떤 고난, 위험의 시기가 긍정의 시기가 될 것 같습니다. 그로 인한 부의 축적을 넘어, 그 부를 잘 사용한다면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류의 죄를 위해 십자가 대속 죽으심과 부활을 기념하는 사순절의 기간의 와중에 있는 기독교인으로서, 이런 내면의 소유의 관심과 갈등이 함께하면서, 그 모두로부터 진실로 자유로울 수 없음을 알며, 반복과 알맞음에 대해 감흥하는 모습을 경험합니다.
당시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한 어느 선조들의 간절한 바램은 가난과 억눌리고, 고통등에 근거한 것이며, 그 바램의 갈증 이면의 진정한 본질은 과연 외형의 부족에 있다고 볼 수 있는지는 의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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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arth.nullschool.net
위의 자료는 미세먼지 자료로 근래 발생한 바이러스 사건 이전과 이후로, 1은 대략 1년 전으로 PM 10이고, 2는 근래의 PM 2.5 라는 미세먼지 크기 차이에 따른 자료입니다. 근래, 바이러스 여파로 공장 가동이 좀 줄어들어 이 정도인 것 같습니다. 10과 2.5의 신체 영향 차이가 있다고는 하여도, 10도 그 영향이 좋다고는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3과 4는 최근의 PM 10과 PM 2.5로 좀 나아진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합니다.
지구는 과연 어떤 모습일 때 정상인 것 같으세요. 물론, 근래와 같은 바이러스의 시기를 살라는 것인가라고 반문한다면, 그런 취지가 아님을 아실 것이며, 한편으로 여러분은 그 만큼 중독되어 무엇이 좋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등 여부에의 판단력을 좀 상실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선 줄로 알면 넘어질 줄 조심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누군가 여러분의 넘어짐을 의도적으로 바램은 아닐 것임에도, 인생가운데 그로부터 예외가 드물겠지만, 오랜 억눌림을 당한 사람에게 있어서는 표현여부의 차이가 있을 뿐, 어느 정도는 즐거워하지 않겠는가 싶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다 봐주실 것처럼 여김을 넘어, 누군가에게 그런 관계가 없는가 주의해 보는 것은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한편으로는, 세상 사람들과 차이가 없는 그리스도인이 되지 말라고 하심으로, 사람들은 이를 잘 드러내지는 않을 것임에도, 실제로는 억눌림은 해소의 대상으로서 여전히 존재하며, 동시에, 용서하라고 하심을 압니다. 애통하는 자와 함께 울고, 즐거워하는 자로 함께 즐거워하라 하심에 미루어, 감정 기복이 심함을 경험하는 애통과 즐거움이 함께 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후, 오랜 시간이 흐른 어느 무렵, 네 명의 일꾼들을 불러 지구를 탐색하고 오라는 지시를 하셨습니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 후에, 한 사자가 돌아왔기에, 어떠한가라고 물어보심에, 괜찮습니다 라고 하였답니다. 또 한 사자가 돌아와서는 형편없습니다 라고 하였답니다. 또 한 사자가 돌아와서는 찾지를 못했습니다 라고 하였답니다. 한 사자는 돌아오질 않고 있다고 합니다. 물론, 이 얘기는 여담입니다만, 그 일꾼들은 무엇을 경험한 것일까요.
역지사지라는 표현이 있는데, 여러분은 진정 어느 곳에서 살고 싶으신가요. 이런 삶의 바램이 과연 시대 착오적 인가요. 그간 타성에 젖어, 너무 안일했던 것은 아닌가요. 이 모습이 하나님의 징벌로 보이세요. 인재는 아닐까요, 자연계는 어떤 경고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요.
넘어질 수는 있는데, 자꾸 넘어진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살펴야 합니다. 위기를 평안하다 해도, 평안한데 위기다라고 해도 적절하지 않습니다. 찰과상인지 경증인지 중상인지 살피고 그에 맞게 행동해야 함을 압니다.
좁은 공간에서 연기를 지속적으로 들이마시면 어떻게 될는지는 잘 압니다. 그간 자연은 연기를 많이 소화했음에도, 언제부터인가 점증하는 자연의 훼손과 더 나아가 좀 더 보완이 필요한 공장 설비 배출 소홀의 결과는 오늘날의 이런 여러 재앙 급 훼손과 역습이 일어나게 한 주요 원인에 포함되지 않겠는가 하는 의문이 듭니다.
이런 환란의 반복을 바라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어느 영역에 속한 사람일까요. 어떤 세상에 등장하는 징계의 의미는 이미 충분히 참으심 이후에 전달되는 모습일 수 있으며, 이를 무시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싶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심에도, 때로는 회복을 위해 징계를 사용하실 때가 있음을 압니다. 그런 시기에 둔감한 모습과 민감한 모습 가운데 어느 쪽이 좋겠는지 싶습니다.
언제가 될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그간 이루어 놓은 인류의 과학 기술 등의 발전 역량과 잠재력을 잘 사용한다면, 고난을 넘어 좋은 결과에 이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외부에 관심을 두려면 진정 내부를 잘 다진 이후에 가능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4차 산업혁명에 관한 여러 얘기가 오고 가는 세대에, 진정한 도달은 아마도 이 문제를 넘어선 환경에 들 때부터 일 것 같습니다.
글을 마무리하려고 보니, 사실 앞서 얘기한 얼굴의 표면에 드러난 것을 다루는 것과 비슷하게 전개를 한 모습은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성경의 말씀을 통해 전하시듯, 사실 사람의 내면, 탐심을 다루어야 진정한 좋은 치료와 같을 텐데 말입니다. 그런 일은 그래서 인생의 능력을 넘어서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세상과 교회의 부도 좀 더 그 곳으로 흘러 들어가면 좋을 것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성경의 등장 인물과 같은 여러 체험을 한 사람에게 가능한 것이기 때문일 것입니다만, 그런 체험의 산 증인이자 후손인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이런 일들과 과연 무관한가에 아이러니가 있다는 것입니다. 관련 당사자 분들이 좀 더 관심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해결에 나서야 하지 않겠는가 싶습니다.
모든 곳이 좋은 환경이면, 사람에게 이주의 동기와 더 좋은 곳에 대한 이상향과 바램이 줄고, 결과적으로 삶의 만족으로 해이해질 것이라고 주장하는 분이 있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 과연 그러한가 의문이 듭니다. 전문가분들의 견해가 필요한 부분입니다.
폭풍은 대체로 두 다른 차이가 어느 정도인가에 따라 그 위력의 차이가 다른 것 같습니다. 오늘날의 삶은 매우 복잡다단한 모습으로 가늠하기 힘이 듦에도,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는 잣대는 아마도, 그 결과를 보면 그간 어떻게 주변과 환경을 이루고 살아왔는지 가늠해 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사람들은 기본권에 대해 얘기를 하는데, 기본권의 기본은 무엇보다도 신선한 공기를 마실 권리이지 않는가 싶습니다. 이에의 비용을 청구한다면 어떻게 될까 싶습니다. 이런 가운데, 오염된 물을 수시로 마시는 지구 반대편 어딘가의 모습이 떠오르니, 뭐라 말하기 또한 곤란합니다.
위기의 시대에 잘못된 해석으로 위험을 증가하게 하는 것인지, 잘못을 외면하여 진실을 왜곡하려 하는 것인지 함께 살펴봐야 할 것 같습니다. 문제라 여기면 답을 찾으려는 모습이 뒤따름이 정상인 것 같습니다. 답 또한 문제로부터 발견할 수 있지 않는가 싶습니다. 피해의 세상에 함께하는 당사자의 한 사람으로서 개인적으로는 좀 오랜 시간이 걸려도 성장과 비효율을 낮추고, 알맞은 투입과 배출 시스템을 최신식으로 재정비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보입니다. 그 작업이 쉽지 않고, 제가 해볼 수 있는 영역을 넘어서기에, 이렇게나마 글을 쓰게 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무엇을 하면 되는 것인가요.
감사합니다.
Mar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