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vercome
삶 가운데 두려움은 긍정과 부정을 동반합니다.
생명체가 태어나 수명이 있고 언젠가는 도래할 죽음을 모르지 않게 되는데, 이를 두려워해 세상 가운데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사람은 어리석은 모습일 것입니다.
같은 선상으로 언제고 도래할 지구의 종말의 예언이 이미 이천여 년 전에 성경의 말씀으로 주어졌음에 두려움으로 아무 것도 행하지 않은 인생은 그와 같을 것입니다.
그간 때론 안일함을 지나며 적지 않은 놀라운 발전을 이룸에도, 좀 더 나은 알맞은 대비를 행하고 지냄을 바라며 제안을 해봅니다.
주인이 이르되 가만 두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자라게 두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 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몪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마 13:29,30)
복음을 전하실 당시엔 가라지를 제하려다 알곡의 다침에 유의를 전하시며 하늘의 심판을 저지 하셨다면, 향후에 종말적 재앙의 도래 시점은 세상 가운데 이미 알곡은 찾기 어렵고 대다수의 가라지가 난무하는 때에 일어날 일임을 가늠해 보게 됩니다.
간혹 알곡의 풍작에도 일손의 비용이 높아 애라 모르겠다 추수를 포기하는 농부 얘기가 간혹 접하게 됩니다만 해당 경우와는 다를 수 있음을 가늠해 봅니다.
계시록의 기록에 천국에 올라간 성도의 세상 가운데 심판하심을 간구하는 기도의 향의 모음에 좀 의문이 있음은, 어느 누군가 무척 무언가에 고생 후에 그곳을 벗어나 참 편한 곳에 머물게 되었는데 그 편한 곳에 머물며 과거를 회상하며 저주를 내는 것은 무엇과 비교 가능할까요
예를 들면 과거 좋지 않았던 개인, 가족, 국가 차원의 어느 노예와 전쟁과 이와 유사한 삶의 체험 등의 시절의 고생을 넘어, 오늘날 당시에 비하면 매우 편리하며 좋아진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데 그 가운데 계속 과거의 때를 회상하면서 저주를 일삼는 삶과 같다고 볼 수 있지 않는가 싶습니다.
무엇 때문에 그런 모습이 등장하는 것 인가요.
분노가 희로애락의 인생에 있는 중요한 감정이기 때문으로 여깁니다. 삶에 스트레스가 없을 수 없는데 이를 알맞게 표현해 내야 도리어 건강이 유지 되기에 그럴 것이라고 보입니다.
예를 들자면 공장의 굴뚝의 매연을 포함한 연기는 어쩔 수 없는 필요한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시절에 따라 그 매연의 배출의 다소와 향상을 이룰 수 있어도, 그 배출이라는 행위 자체를 제거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삶의 어쩔 수 없는 산물인 분노는 필요한 것입니다. 다만 어떻게 행해야 하는 방법론이 중요하며 인생의 교육과 지식의 존재 이유인 것입니다.
어느 누군가 분노할 것이 없는 삶을 살며 그런 가르침을 따라 살고 있다고 자부심을 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요. 그런 존재는 사회와 완전히 격리되어 혼자 사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런 삶은 존재 가능해도 참됨과는 먼 불가능한 이상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분노를 효과적으로 다스림이 인생에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분노는 먼저 스스로를 파괴하기 때문입니다. 그럼 어떻게 가능할까요
오직 성경의 구약을 넘어 복음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가능합니다.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엡 4:31, 32) 하심이 산상수훈을 포함하여 성경의 복음서를 통하신 하나님의 참 뜻으로 가늠합니다.
앞서 언급한 천국에 거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잠시 순간을 넘어 지속 반복적으로 그렇다면 그분들은 진정 내면에 성령이 임한 것인지 사탄이 임한 것인지 구별해 봐야 하지 않는가 싶음이 있습니다.
솔로몬의 때에 두 여인과 한 아기의 유명한 재판을 통해 참 부모를 분별해 볼 수 있듯이, 징계를 바라는 영혼들을 향해 그 간구를 제어하시며 리더로서 누군가 순교와 같은 희생을 좀 더 이룸과 그 기간에 믿지 않은 인생들의 주를 영접할 기회를 주시려 하심의 긍휼을 가늠해 봄이 진정한 모습 같습니다.
과거의 어느 기간을 회상하면서 여전히 저주를 품는다면 분명 오늘 당사자의 삶이 그때와 비교해 그다지 나음이 없다는 반증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로 여전히 삶이 힘들고 괴롭다면 그와 같이 과거의 회상이 같은 선상이기에 계속 불평 불만의 저주가 생김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천국의 성도의 지상 심판의 기도는 그분들과 같이 세상의 고난의 체험을 지상에 있는 그 후손들이 경험하지 않기를 바램과 그런 핍박 가해를 저지하기 위한 간구의 기도인가, 그렇지 않고 과거에 적절히 충족의 체험을 못한 것에 대한 억울함과 분노의 표출인 것인가요.
물론, 잠시의 회상 가운데 울컥하며 슬픔, 긍휼과 함께 분노도 등장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현재의 삶의 불만족이라고 단정 짓기 보다는 내면에 감춰졌던 흔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즐겁게 자연을 만끽하는데 갑자기 발에 따가움이 느껴져 불쾌감 고통이 생겼음에 보니, 작은 가시가 천을 뚫고 박힘과 같습니다. 그것은 빼어내고 제거해야 합니다. 그럼으로 내면의 불쾌한 감흥을 보내 버릴 수 있습니다. 불편하고 게을러 이를 참고 계속 가려 한다면 때마다 드는 불쾌감에 좋은 감흥을 방해합니다. 같은 선상으로 내면에 지니고 있는 어느 불편한 감흥이 있다면 꺼내어 제거해야 합니다.
어떻게 가능한가요. 언급한 바와 같이 직접 가시를 빼내는 것과 같이, 자신의 어느 불만 상한 감정을 적절하게 표현하고 드러내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 때 그 직접적인 당사자가 있다면 서로 알맞게 소통하면서, 없으면 독백으로 가상의 인물을 놓고 그런 일을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그런 행동은 결국 자신에게도 유익이 되지 않습니다. 잘못을 동급으로 행하는 등은 참된 진리인 복음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나아가 객관적으로 살펴 여러모로 형편이 많이 좋아졌으며 나름 내면의 쓴 뿌리를 토로해 냈음에도 여전히 울분에 괴로워한다면 욕심 탐심 등에 젖게 하는 사탄의 지배하에 있을 가능성이 적지 않다고 여겨집니다. 모르지 않듯이 사탄은 존재합니다.
나아가 이의 해결을 위해 참 교회의 참 그리스도인의 도움을 얻던지 정신 의학자, 상담가 등의 도움을 통해 내면의 울화를 풀어내어 스스로와 주변에 유익으로 나아 갈수 있다고 보입니다.
계시록의 기록에 있는 불평을 드러내는 성도 그리스도인의 영혼의 외침은 그 곳이 진정 천국이 맞는가 하는 조심스런 의심을 해보게 되는 이유이며 따라서 영혼도 희로애락을 지니고 있구나 라고 가늠해 볼 수 있으며, 경험치 못하고 부족한 아쉬운 무언가가 있음의 반증으로 가늠해 볼 수 있습니다.
아무리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그냥 소리 나는 꽹가리와 같다고 하심의 말씀과 같이 하나님은 사랑이심을 깊이 깨달을 수 있습니다. 결국 세상에는 악인만 득세하는 그 시절의 도래에 계시록의 지구와 우주적 재앙의 심판이 임함을 가늠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오직 그 때와 시기는 하나님 만이 아심으로 주의해야 합니다만, 세상 가운데 악이 전적으로 주도하는 때인 것을 어렴풋이 가늠해 볼 수는 있습니다.
그간 어느 잘못된 재림의 시절 판단 등은 결국 시야가 넓지 않아 등장한 모습으로 가늠해 볼 수있습니다. 자신의 주변은 그런 것 같은데 전 지구적 관찰이 불가능하였던 시절에 개인과 주변에 너무 함몰한 나머지 좀 더 객관적으로 볼 때 판단의 오류의 결과인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계시록의 멸망 당하는 탐욕의 모습들 관련 치부한 모습들이 오늘날과 앞으로 등장할 최고와 최첨단 보물 관련 묘사가 아닌 당시에 있던 금 은 구리 대리석 보화 음식 장식품 등을 나열함을 통해 당시로 그렇게 멀지 않는 시절에 관한 심판임을 가늠해 보게 되며, 이를 근간으로 본질적으로 세대를 넘어서 인류사 순환 가운데에 그러한 잘못의 시절의 도래에 임할 심판도 그 당시의 수준에 상응하게 됨의 가능성을 가늠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시절에 누군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옳음을 전달한다면 그 존재는 재림한 그리스도와 같은 옳은 모습으로 여겨질 수 있을 것임에도, 이는 성령이 임한 참된 그리스도인이며 장차 천국의 십사만사천이라는 상징에 속하는 세상의 물욕과 정욕과 먼 삶을 살아간 택함을 입은 향후 하늘 천상계의 리더 존재라 보는 것이 적절할 것 같습니다.
착각은 자유입니다만, 혹여 자신이 하늘 보좌의 구름과 같은 일반의 허다한 무리의 성도 가운데 한 명인지, 십사만 사천 가운데 한 명인지 가늠해 보고 싶다면 그간의 삶을 점검해 보면 어렵지 않게 가늠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느 그리스도인이 십사만 사천명 가운데 과연 어느 정도 충원이 되었나 의 궁금으로 오랜 기도 후에 천사가 등장해 답을 주었답니다. 그대만 알고 있으라며 한 10% 정도 충원이 되었다는 말에, 아니 우리 조부모님 때도 그 정도라고 알림을 얻었다는데 여전히 그런가요 에 그곳도 사정이 있어 증감이 있다고 전하더랍니다. 물론 여담입니다.
그렇다면 이미 도저히 간과할 수 없는 심판의 대상인 죄인 각각을, 과거 모세의 시절 심판하심과 같이 정밀 타격하듯이 징계 제거 하실 수 있으신 하나님이신데, 계시록에 기록된 바 왜 전지구적 심판을 행하는 것일까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전지구적 엄청난 규모의 산과 지각 변동을 일으키고, 우주의 별들을 제거하시는 등 인간이 가늠하기에 실로 엄청난 재앙을 일으키심이 과연 무슨 이유 때문인 것인가요. 어쩌면 지상의 죄악을 넘어 천상계의 문제에 기인한 것은 아닌가와 또 다른 깊은 무엇이 있는가를 조심스럽게 추측해 보게 됩니다.
산고의 고통이 힘들어도 그로 유익이 이어지듯이 그런 심대한 재난이 도리어 필요한 이유. 지구라는 낡고 좁아져 버린 곳을 넘어 우주로 향하라는 것은 아니신가 싶습니다.
성경을 포함 인류사에 적지 않은 예로, 환란을 통해 원치 않는 이주를 하게 되어 다른 곳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내어 도리어 과거보다 나은 삶을 살게 되는 예가 인류 역사에 적지 않음과 같은 선상으로 볼 수 있음과 같다고 여겨집니다. 그렇게 지구를 넘어 우주에의 삶의 어느 정도 이루어진 이후에 같은 선상으로 그 수준에 맞는 재난의 도래 가능성을 가늠해 볼 수 있음을 가늠해 봅니다.
글쎄 십 년, 오십 년, 백 년, 수 백 년 등 이후 어느 시절에 그 일이 일어날 지는 모름에도 이와 관련해 준비하며 여러 제품의 품질과 및 여러 시스템 등을 보완해 놓고 있으면 그렇지 않음에 비해 좋지 않는가 싶습니다. 인생의 일들이 이런 모습들이 적지 않기에 아이러니는 역시 이런 부분에도 적지 않음을 발견합니다.
집, 욕조, 풀장, 자동차, 선박, 냉장고, 세탁기, 생수병, 생수통, 정수기, 의류 등 주변에 많은 모습에 재난 안전 대응의 보충을 이루면 좋은 모습을 발견하며 이루면서 근래 환경 친화적 ESG라고 하는 접근을 넘어 안전 산업화 접근으로 좀 더 나은 품질과 고도화를 진행하면 적절할 것 같습니다.
지하 세상과 함께 수면 위의 가능성도 대응하며 위기 대응 연습도 해보면 어떠한가 싶습니다. 물론 균형을 놓치지 않으면서 말이죠. 더 나은 발전된 등장의 도움이 이런 가늠에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최선의 방법은 성경의 말씀으로 전하시는 바와 같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리스도인이 되어 살아가는 것일 것임에도 주어진 삶의 여러 모습도 중요하고 필요하므로,
제안해 보기는 여러 제품들에 방수를 잘 이루어 물에 가라앉지 않는 제품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삶에 밀접한 자동차 등에 이를 가능하게 하면 어떤가 싶습니다. 관련 전문가 분 들께서 설계, 디자인, 제작 등을 잘 하여 보완하면 평시와 위기 시에 무관하게 좋을 것 같기에 제안의 창작을 해봅니다.
기본적으로 자동차는 물에 들어가면 뜬다 와 탈 부착 엔진을 달면 날 수 있다 라고 명제화 되는 기술력 어떠한가요.
성경 말씀의 한 구절이 중요함에도 어느 한 구절에 치우치면 잘못에 이를 수 있습니다. 구약을 넘어 신약의 세대에 주의 가르침은 은혜의 용서와 사랑이 핵심이며 근간입니다.
언급한바 때로 등장하는 재난이 세상과 함께하는 삶의 일반임을 자각하면서도 내면의 여유를 잃지 않으며, 존재하는 부정적 실체를 감추기 보다는 익숙하게 노출하여 이를 극복해 나가는 모습에 이르기를 바래봅니다.
물론 단기간에 너무 많이 거짓을 전해 지쳐서 그럴 수 있음에도 늑대와 양치기의 우화에 거짓을 외침에의 비난적 교훈을 넘어, 그것을 때마다의 훈련으로 여겼다면 결과가 어떠했을까 싶음이 있습니다.
AI 등의 등장에 놀라움과 두려움이 공존하는 가운데, 긍정과 함께 더 높아지는 AI의 거짓을 꾸미는 능력에 대해서도 이의 구별을 위한 또 다른 영역의 지속 발전이 함께하는 가운데 그 모두는 이전에 비해 더 증가하는 산업의 체계를 이룸의 아이러니를 가늠하게 됩니다.
사순절의 시기에, 앞서 언급한바 인생에 반드시 도래할 죽음의 두려움에 종이 되어 힘겹게 살아가는 인생이 되기를 하나님은 진정 바라지 않으심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로 대속 죽으심과 부활 승천을 이루시어 그 분을 믿는 믿음의 자녀들로 천국 영생의 길에 들게 하신다는 것을 확실히 붙잡고 나아가는 삶이 되길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Mar 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