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 1


어떤 현상을 짧게 내지는 길게 풀어 낼 수 있습니다. 누군가는 짧은 시로 누군가는 긴 글로 표현할 수 있으며, 시도 묶어내면 길어지고 긴 글도 단락을 지어내면 짧은 글로 편집되어 긴 글의 그 때 그때의 얘기가 될 수 있습니다.

인류의 역사, 더 나아가 존재하는 만물의 모습 자체를 살펴봄에 성경의 창세기의 말씀과 같이 짧은 서술이 있으며, 그 과정에 대한 과학 기술적 탐구로 그 과정이 매우 오래되었다는 주장 모두는 가능할 수 있습니다. 다만, 그 모습의 과정에 예수 그리스도라는 창조주께서 보내신 그분을 어떤 관점으로 살펴보게 되는가의 차이가 궁극적으로 다루어야 부분이라고 하겠습니다.

창조론을 믿는 사람으로서, 진화론의 존재가 있음을 알며, 이러한 관점 이면에 있는 그것의 시작과 귀결에 창조주 하나님, 기독교적 표현, 의 계심과 그분이 지으신 세상에 성령이라는 성스러운 영으로 2000여년 전에 세상에 오신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오늘날 개념으로서 지식이 된 것을 받아들이는 것의 여부의 차이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는 이미 존재하는 과거의 역사, 연대기적 모습에 대해 어떻게 이해하는 가의 차이와 같은 선상으로, 과거의 사건의 참, 실제, 오류, 거짓의 판단 여부와 관련이 됩니다.

존재하는 빛, 공기, 나무, 물, 태양, 달, 행성, 항성 등과 같이 존재물에 대한 인류의 오랜 사유의 체계와 함께, 달력이라는 시간 체계화의 규칙의 탄생과 구분의 근거가 되는 2018년 이라는 숫자적 시작의 기준점에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시점이 맞추어 있음에 대하여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와 같은 선상의 이해를 할 수 있겠습니다. 그 분이 참된 신 되심을 받아들임과 의심, 모름, 그것의 부정, 거부의 모습의 범주 내에 여러 다름의 모습이 있음도 그와 같다고 하겠습니다.

이는 모든 것의 태초에 모든 것의 시작을 이루신 이는 하나님이심을 받아들이는가 여부와 같은 선상에 있습니다. 그 시간의 차이와 당시 여러 사건의 모습에는 많은 현상이 있을 것임에도 그것은 사실, 진실, 진리인 사건이었다라고 받아들임의 여부가 곧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가로 이어지게 하는 중요한 원동력의 근원이 될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성경의 기록과도 같이, 그것을 가능하게 하심은 성령에 의함이며, 그것을 가로막음은 미혹의 사탄의 영에 의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한 곳으로부터인가, 여러 곳으로부터인가
' 창조, 인류가 지구의 여러 곳에서 각각 존재하며 시작하게 되었다는 것 '이 성립한다면, 우주 공간에 존재하게 되는 수 많은 행성, 항성 등이 각각 여러 곳에서 시작하였다는 가설과 같은 선상으로 살펴져야 하며, 이는 실제 우주 공간을 이룬 존재에 대해 설명 가능함과 함께, 주장하고 있는 빅뱅이라는 최초의 시작 이후에 전개되는 다중 우주론 내지는, 빅뱅 그 이전의 다중 우주론의 배경이 됨에도, 여전히 그 최초의 시작 부분에 대하여는 참 가치와 어느 정도 거리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느 누군가의 이론으로부터는 무한, 불가지 등의 알 수 없음이며, 기독교는 알파의 처음이 됩니다.

어느 글을 기록하는 때, 공개하는 때와 이 글을 생각한 시점은 다를 수 있듯, 그 이전의 생각을 각 사정에 의해 그 후의 어느 시점에 옮길 수 있듯, 이전의 생각에 개입하여 변경이 있을 수 있듯, 공동체의 모습에는 각각 전진과 후퇴 모습이 있는 가운데, 혹여 자신이 다 안다고 하지는 않는지, 자신만 나아가고 있다면 된다는 모습은 없는지, 전능하신 창조주의 일하심에 대해서 무지하지는 않는지 가늠해 보려는 모습은 가능하다고 하겠습니다.

 

0 = 1

곱하기는 더하기와 같은 선상에 있을 수 있습니다. 제곱 승의 경우는 배율과 같은 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X의 몇 승 이라는 명제의, X 와 몇 이라는 승의 그 자리에 각각 0, 1, 2, 3, 4, 5, 6, 7, 8, 9, 10, … 1,000,000,000,000,000,000 ….. 등의 수식에 맞게 그 숫자가 표현 될 수 있으며 그에 해당하는 값을 갖는다고 수학적으로 표현 할 수 있다고 합니다.

 

 

 

' 그림의 공식 ' 과도 같이 중심점을 기점으로, 공간의 전, 후, 좌, 우, 상, 하 등의 곳에 X 값의 어떠한 승이 오더라도, + 덧셈과 - 뺄셈 같은 나름의 순차적 증감과는 다른, 전후좌우상하의 모든 곳이 지정된 배율로 증감이 이루어지므로, X의 자리에 0을 제외한 숫자의 몇 제곱 승의 경우에, 그 공간 배율의 곱한 값을 지니게 된다 는 수학 명제는 오늘날에도 유용하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는 이전의 글을 통해 가늠하였듯, 어느 곳에 이르는 길 안내의 간략한 소개 내지는 상세한 소개가 삶에 존재 가능하듯,
오래 전 누군가에 의해 지도, 길이 직접 답사하며, 상세하게 기록되어야 할 필요의 시기를 지나, 점차 자료가 쌓여 오늘날에는 도로, 철로 등과 그곳을 이동하게 하는 여러 도구 장치의 등장의 결과로서, 어떻게 다수가 빠르고 안전하게 그곳에 이르게 할 수 있는가로 인류의 모습이 진행되어 나가는 것과 같은 선상으로 살펴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주관적으로는 이전보다 매우 빠르게 변화하는 것 같음에도, 우주 공간이라는 피조된 존재의 성장에 대하여는 여전히 상대적으로 그렇게 빠르다고 할 수 없음의 모습에 있음을 간과할 수는 없는 부분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의 광야 길에 사흘 길을 사십 년이 걸림과도 같이, 그런 정체 구간의 시기를 지구 공동체는 놓여 있다는 관점도 가능할 수 있겠습니다.

‘ 다니엘아 마지막 때까지 이 말을 간수하고 이 글을 봉함하라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리라 (단 12:4) ‘ 의 급히 변모하는 모습에 대해 적용하는 이 구절에 대하여 모든 세대에 무리한 적용은 주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해 봅니다.


점 간의 위치가 보는 위치와 각도에 따라서 그 거리가 다르게 보일 수 있듯, 급히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므로, 곧 마지막 때라고 하는 주장은 신중해야 한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가르침의 본질을 왜곡해서는 곤란함을 압니다.

 

' X의 0제곱이 1 ' 이라는 수학적 명제는 피조물인 인간의 관점으로 최초, 기초, 기본 단위이자 한 단위인, 한 존재가 있어야 하므로 1 이라고 나타낸다고 하겠으며, 모든 존재하는 첫 존재이시자 기본 단위인 하나님이 되심이라는 표현으로 성경을 수학적 관점으로 살펴봄이 가능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그 후의 모든 존재는 창조주의 피조물이 된다고 하겠습니다. 성경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인간의 관점이 스며있으며, 여호와, 야훼를 사용하는 권역이 존재하며, 스스로 계신 분이라는 표현을 통해, 인간의 지력으로 가늠하기에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음을 드러냅니다. 이는 어느 때라도 같은 선상에 있음을 부인할 수 없겠습니다.


0의 0 승인 경우에도 1이라고 할 수는 있겠습니다.
왜냐하면, 존재 자체가 소수점을 사용하여 최대한 없음에 이르려 하는 시도조차도 부정할 수 없는 한 존재를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며, 0 보다는 1이 생명체인 존재에는 합당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한편으로, 경우에 따라서는 누군가에 의해 같은 부분이 있다고 할 수는 있음에도, 0과 1은 같다고 할 수는 없다고 해야 하는 모습도 있습니다. 멀리 보면 비슷하고 같은 듯 여겨질 수 있음과 같습니다. 실제의 경우 0과 1이 같다고 한다면 이상하고 다르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잘 적용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멀리 있지 않음에도 0과 1이 같다고 할 수 있는 경우가 있다는데 있습니다.

 

그림과 같이 보는 여러 관찰 방면이 다름에 따라 같지 않게 보임에도, 어떤 위치에는 0도 1로 보일 수 있는 위치가 있습니다. 오류, 잘못이라고만은 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1 의 경우 0 이 될 수는 없습니다만, 드문 경우의 착각을 통해 0 이다라고 여기게 되는 경우는 존재 가능할 수 있습니다. 한편, 멀리서 본다면, 0인가 1인가 혼동이 될 수 있는 거리의 지점이 있으며, 어떤 존재의 때에는 그것의 혼동이 가능할 수 있겠습니다.

꼭 같지는 않아도 태양, 달, 별, 구름이 보임과 안 보임과 같은 모습이 있음도 살펴봅니다.

인문 사회학적으로 이러한 경우가 많이 있을 수 있으며, 수학 과학적으로도 그런 부분이 있을 수 있음을 가늠할 수 있겠습니다.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은 삼위일체로서 같은 분이심에 대해, 삼위일체라는 신앙적 표현의 이해에도 이와 같은 부분이 있음을 살펴 알 수 있겠습니다.
'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 14:20),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요 15:1) '
의 구절을 포함해 성경의 여러 인접한 의미로서, 전부와 일부의 다름과 같음이 될 수 있다는 구절들이 주는, 피조물의 세상 일반에 인문 계열과 과학 계열이 소통 가능할 수 있음을 살펴보는 근거가 되며, 그분은 존재의 근원 되시는 창조주이심을 깨닳게 하십니다.

0 부터 무한 이전의 수와 무한 까지, 어떠한 숫자든 0 승의 경우 1 이 된다는 것은 곧 그 피조물의 모두는 하나님 안에 있음을 의미하며, 또한,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승을 통해 이루어진 구간, 범주의 무한대의 경우도 곧 1 과 같은 범주의 모습이 되며 소통이 가능하다는 모습을 통해 주신 성경의 말씀을 살펴본다면, 그 뜻의 소통과 세상의 여러 모습의 근간에 있는 공통점을 살펴볼 수 있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알파와 오메가 되시며, 처음과 나중이신 존재에의 표현에 대해,
곧, 어떤 표현을 넘어 최초의 개념이라고 인간이 명명할 수 밖에 없는 한계 내의 그 존재이신 창조주 그 분의 존재는 인간의 지식과 지혜를 넘어서기에, 인간이 알기에 가장 가능한 표현으로서 처음이라는 기록은 합당하며, 인간이 알고 지적하고 가늠한 알 수 없음을 무 라는 0 이라는 것으로 명명하기로 한 그것의 한계 내에서, 그리고 그 마지막이 되는 나중, 끝과 오메가라는 마찬가지로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최선의 표현인 나중, 끝과 오메가라는 관념을 통해, 그 마지막은 곧 여전히 한 단위이며, 숫자적으로 가늠하기 불 명확한 정도 조차라도 그 모든 것은 여호와 하나님이심이라는 성경의 저작을 이루게 하신 그분은 유일하시며, 위대하시며,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 이십니다. 아멘

그분의 인류에게 전하시는 가르침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이 완전하심을 믿습니다. 아멘

 

감사합니다.
Jan 2018

 

Copyright © many rights reserved. Thank you.